크게 이념적 주제와 탈이념적 주제로 나누어볼 수 있는 북한 문학에서 남한 독자들에게 주요 관심의 대상이 되는 분야는 탈이념적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다. 최근에 나온 북한의 단편소설 [해후]는 과거 세대의 사회적 헌신성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의 일상 현실을 그려낸 탈이념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내용 전개상으로는 은퇴한 제대군인건설자들의 해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북한 문학이 지닌 일정한 도식성(문제제기-문제해결)과 사회적 헌신성을 지닌 긍정적 인물의 형상화, 과거의 이념적 지향을 현재적 표준으로 삼는 선형적(線形的) 세계관 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 소설의 현재적 양상을 여실히 드러낸다.


[해후]는 40여 년 전 지은 6층 짜리 조립식 주택을 배경으로 북한 인민들의 생활상을 그려낸 사회주의 현실 주제의 소설이다. 제대군인건설자들이 종파분자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1958년에 지은 조립식 주택에 처음부터 입사해서 살고 있는 '전기수'는 북한에서 처음으로 조립식 살림집을 지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어서, 맏아들이 살고 있는 90년대의 현대식 살림집으로 이사 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빌어먹을'이라는 비속어를 입에 달고 사는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걸어다니는 설계도면'으로 불리울 정도로 조립식주택에 대해서는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꿰뚫고 있어, 주위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일요일날 아이들의 층별 체육경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전기수에게, 40여 년 전 주택 공사를 같이 했던 해군중사 김우진과 그의 아내(해군하사 련희)가 토요일 저녁에 찾아와, 자신들의 막내아들 결혼식에 그를 초대한다. 그리하여 당시 건설사업소 부기장이었던 강철룡까지 포함해서 네 명의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이게 되고, 전기수는 일요일 오전 조립식 주택에서 벌어지는 체육경기를 함께 보아야 결혼식 초대에 응하겠노라는 말을 하면서 김우진 내외를 하루 묵어 가게 한다.

하지만 정작 일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공교롭게 강철룡 집 부엌에서 물이 차오르는 일이 벌어지고, 집 바깥의 하수도가 잘못된 것을 알게 된 김우진은 40여 년 전 일을 떠올리고, 무언가 도구를 찾으러 떠난다. 뒤늦게 도착한 전기수도 하수도관에 임시조치를 취한 뒤, 40여 년 전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40여 년 전 토요일 저녁, 김우진으로 하여금 련희와 함께 영화를 보며 연애를 하라고 떠나보낸 뒤, 전기수가 낡은 하수관 토막으로 하수관 마무리 공사를 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 화근이 된 것이다. 터진 하수관을 보면서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전기수는, 일요일이고 기중기도 없으니 작업을 중지하라는 중년의 보수사업소 작업반장의 말을 들으며, 작업반장이 과거 종파분자들과 똑같은 핑계를 대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당시에 맨손으로 만들었던 '기중기'를 기억해내게 된다.

말없이 도구를 찾으러 떠났던 김우진이 활차 2개와 밧줄퉁구리를 구해와 임시 방편으로 기중기를 만들어 장애가 되었던 '블로크장'을 들어올릴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낡은 하수관 토막 대신 새 하수관 토막을 찾아 연결하고, 비로소 층별 체육경기가 시작되면서 작품은 종결된다.

40여 년 전 한창때 밤낮없이 일했다는 김우진, 아무런 기계의 도움없이도 잿더미 속에서 세운 조립식 주택에 자긍심을 갖고 있는 전기수,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쳐 아름다운 거리를 가꾸자는 강철룡, 어려운 현실적 고비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작업반장 등은 모두가 지금보다 힘들었던 과거를 신념의 기준으로 삼아 현재를 이겨내려고 한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어려운 나라 사정을 감안하여, 정신력으로 현재의 고비를 넘어서자는 식의 논리는 현실에 상존하는 물질적 궁핍의 문제를 도외시할 가능성이 크다. 정신력의 무장만으로 엄연히 실재하는 현실의 험난한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해후]는 탈이념적 주제를 다룬 대부분의 북한 소설이 그렇듯, '문제제기-문제해결(하수도관 파열-하수도관 수리)'이라는 도식성, 긍정적 인물들의 형상화(문제적 인물/부정적 인물/동요하는 인물 등의 부재), 정신력으로 물질적 궁핍을 이겨낼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 과거에 기대어 현재적 문제를 극복하려는 단선적 세계관 등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체제 유지라는 대명제 속에 북한 소설의 틀이 규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세대 간의 인식 차이와 물질적·현실적 어려움 등이 구체적 생활과 대화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북한 소설이 체제나 이념 중심이 아니라, 일상 현실적 접근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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