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 <망령 亡靈>은 1974년 <월간문학>1월호에 발표된 작품이었다. “1972년 시월도 다간 어느 날, K대학 역사과 교수 한민상(韓民相)씨는 어떤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절려온 한 통의 전화에 온통 신경을 빼앗기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이 단편소설은 당시 군사정부 시절의 되돌아온 독재의 망령을 그려본 것이었다. 이 작품은 한 대학교수가 어느 날,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어떤 사내로부터 “내일에라도 직접 뵙고 협조를 요청하겠다”는 일방적인 ‘통고’를 받게 되면서 맞는 불안한 하루의 기록이다. 그 교수는 답답하리만큼 신분을 밝히지 않는 그 사내에게 아무 대꾸도 못한 자신에게 놀랐고, 필요이상으로 정중한 음성의 사내에게 주눅이 든 자신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마침 이날은 얼마 후 독일 유학을 떠나는 제자의 방문을 받고 서재에서 둘만의 조촐한 환송의 술자리가 마련된다. 아침에 걸려온 전화를 잊으려는 듯 한 교수는 오랜만에 만난 제자와 그의 장도를 축하하는 술을 거푸 들었다. 역사학계의 올곧고 꼬장꼬장하기로 정평이 난 한 교수와 예리하고 분석적인 글을 써내는 소장학자인 두 사람의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난 뒤 제자가 문득 스승에게 말한다. “선생님, 사실은 저의 독일행이 취소되었습니다.”

커튼 사이로 비친 시월의 저녁하늘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지붕위에 걸려 있고, 이웃 D발전소 쪽으로부터 들려오는 굉음이 간헐적으로 창문을 두드린다. 한 교수는 문득 제자가 언젠가 육이오 당시의 부친의 행적에 관한 얘기를 꺼냈던 일과, 그 즈음에 어떤 저널에 쓴 그의 칼럼에 대한 생각도 했다. 교수는 직감하고 물었다.

“부친 때문인가?” “모르겠습니다.” “그 칼럼 때문인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대화로이어지는 이날 저녁의 환송파티는 우울하게 끝났고, 제자는 ‘당국’의 조치를 기다릴 수 밖에 없노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뜬다.

한 교수는 이날 늦둥이 막내와 저녁 산보를 나선다. 취기와 함께 엄습하는 알 수 없는 공포로 도무지 서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저녁 산보에는 예외없이 애견 재둥이가 동행했는데, 이 소설은 싸늘하고 음산한 시월의 밤, 동네의 강변 언덕에서 한 교수가 애견을 죽이면서 작중의 불안이 강화된다. 그가 어둠의 한쪽 끝에서 들려오는 막내아이의 울부짖음에 달려갔을 때 이미 개는 아이의 한쪽 귀를 물고 있었다. 개가 떨어지지 않자 한 교수는 돌로 쳐 떼내고, 이제 자신에게 달려드는 개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애견을 죽인 한 교수에게 공포와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들은 대문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기다란 초인종소리를 듣는다. 대문이 흔들리자 “재둥이가 돌아왔다”고 딸이 달려 나가고 한 교수는 서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대문 앞, 이웃집 개의 낑낑거리는 소리와 낯선 사나이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그는 나직히 중얼거린다. “미친개가 돌아왔어.....”

이 소설은 발표당시 검열에서 일부삭제 되었다. 그 후 나의 문학선 <원무 圓舞>(나남, 2004)에 재수록 할 때에는 <미친개>라는 원제목을 살렸다. 작품의 서두는 “1980년 시월도 다간 어느 날, K대학 역사과 교수 한민상(韓民相)씨는 어떤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로 바꾸어 놓았다. 1972년을 1980년으로 바꾼 것이다. 첫 번 텍스트 <망령>의 시대는 1974년으로 시월유신이 일어났던 당년이었고, 두 번째 텍스트 <미친개>는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해이다. 1974년을 1980년으로 바꾸어도 텍스트의 다른 내용은 전혀 바꿀 필요가 없었다. 74년의 텍스트를 80년의 텍스트로 바꿔치는 이 장난은 되돌아온 독재의 망령에 대한 야유였으며, 텍스트 생산자와 그 생산자가 처한 문화적 조건에서 거리를 둘 때 생기는 ‘거리두기’의 효과에 대한 믿음이었다. 거리두기는 역사를 견디는 텍스트의 능력이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은 참으로 익숙한 과거에로의 시간여행이다.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의 자진 사퇴 요구, 언론계 인사에 대한 고속 물갈이, 정부홍보성 문화행사만 치우친 지원금, 문화단체에 대한 ‘시위불참 확인’ 요구, 촛불집회 참여 시민단체에 정부 보조금 지원 중단. 시국선언교수에 대한 연구비 지원 불가조치..... 언젠가 익숙하게 경험했던 이 ‘공안문화’들은 무엇보다도 그 방법의 진부함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문화란 무엇보다도 창의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가치이다. “2010년 어느 날.........”로 시작되는 또 다른 텍스트는 이제 더 이상 씌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역사의 관찰자가 아니라 역사적 존재라는 인식이 더욱 필요한 때다.

 서종택 인문대 교수 미디어문예창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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