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는 맑지만 밤하늘을 올려다봐도 별은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가득 품은 구름이 조금만 뛰어도 머리에 닿을 듯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눈발이 흩날리는 러시아 칼미키아 공화국 바스호트 마을에 빨간 조끼를 입은 고대생 18명이 발을 디뎠다. 본교 사회봉사단이 활동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꾸려진 러시아 사회봉사단은 고려인 및 현지주민과 문화를 교류하자는 취지로 출범했다. 지난 1월 24일부터 2월 5일 약 2주간 사회봉사단원으로 참여한 기자가 그들의 행보를 쫒았다.

서울에서 바스호트 마을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인천에서 모스크바로 9시간, 여기까진 해외로 갈 때 누구나 밟을 법한 코스다. 하지만 진짜 여정은 이제부터다. 모스크바에서 볼고그라드로 가기 위해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반, 그리고 볼고그라드에서 자동차로 3시간 반을 더 이동해야 바스호트다.

교통편이 이렇다보니 지금까지 국내에서 러시아로 해외봉사를 떠난 경우가 많지 않다. 대한사회봉사단협의회(이하 대사협)에서 4번에 걸쳐 러시아 칼미키아 공화국으로 봉사단을 파견한 게 전부다. 본교는 기존 봉사단과의 차별화를 위해 칼미키아인 중에서도 고려인에 초점을 두고 봉사를 기획했다.

“즈드라스뜨 뿌이쩨!”
바스호트는 아스팔트 찻길조차 없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짜른이라는 소도시 옆의 위성마을 쯤으로 보면 된다. 짜른엔 1천명 가량이 살고 있는데 그 중 6~700명 정도가 고려인이다. 봉사단이 머문 바스호트엔 고려인이 30명 가량 살고 있다.

총 15시간의 여정을 거쳐 봉사단은 현지 시각 1월 25일 새벽 4시 바스호트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봉사단을 기다리고 있던 고려인의 얼굴엔 졸린 기색이 역력했지만 반갑게 봉사단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고려인의 서툰 인사에 단원들은 미리 연습했던 대로 “즈드라스뜨  뿌이쩨!(안녕하세요)”라고 현지인의 말로 답했다. 마을에 큰 숙박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단원들은 2~3명씩 마을주민의 집에 홈스테이식으로 머물며 현지인과 친분을 쌓았다. 

이 마을 고려인은 구한말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해 살던 1,2세대 고려인의 후손이다. 1970년대 우즈베키스탄의 많은 고려인이 칼미키아 공화국에 강제 이주돼 본토 사람과 어울려 새로운 문화를 꾸려나갔다. 러시아에선 이들을 ‘까레이스키(고려인)’라고 부른다. 이제 3,4,5세대에 이르는 이곳 고려인은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 한다. 이민 2세대인 백화식 씨는 한국말에 능통한 몇 안 되는 현지인 중 하나다. “50년 전 부모님께 매를 맞아가며 한글을 배운 뒤로 이렇게 한국인과 얘기해보긴 처음이라우. 생전에 한국 대학생을 만나다니 꿈만 같소”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한국도 칼미키아도, “끄라씨바”
러시아에선 통제가 엄격해 외국인이 늦은 시간까지 밖에 머물 수 없다. 봉사단은 바스호트에서의 일정을 매일 오후 8시전까지 마쳐야 했다.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봉사단에게 주어지는 활동 시간이 하루 8시간 가량 밖에 되지 않아 단원들은 매일을 분주하게 보냈다. 

둘째날인 26일 오후, 바스호트 마을회관에선 가야금 곡조에 맞춰 여자 단원들이 부채춤을 추고 있었다. 바로 다음날 있을 한국전통문화공연 리허설이었다. 봉사단 팀장을 맡은 이규평(공과대 신소재03) 씨는 “출발 한 달 전부터 택견, 사물놀이, 부채춤, 대중가요공연 등 다양한 볼거리를 준비했어요. 연습기간이 아깝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공연은 가히 성공적이었다. 봉사단은 바스호트 마을회관과 짜른 소재 공립학교에서 총 3번에 걸쳐 공연을 선보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단원들의 무대가 끝나자 곳곳에서 “끄라씨바, 끄라씨바!(예쁘다)”라는 환호가 터져나왔다. 무대 뒤편은 사진을 찍겠다고 몰려든 현지인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바스호트 주민도 화답의 의미로 공연을 준비했다. 봉사단과 마찬가지로 부채춤을 준비한 고려인 학생들이 무대 위에 올랐다. 한복을 입고 부채를 들고 추는 것은 똑같지만, 음악과 춤에 칼미키아 특유의 느낌이 가미돼있다. 고려인들은 “대부분 한복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큰 행사나 명절 때만 입는다”고 입을 모았다.

봉사단은 현지인을 위해 전통연과 전통가옥 모형, 한지공예품도 만들었다. “와! 저게 어떻게 날지?” 방패연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자 현지 학생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러시아의 세찬 바람은 한국의 방패연과 가오리연을 더 높이 날렸다. 3차례의 공연 교류가 일회적인 것이라면, 전시품 제작은 봉사단의 흔적을 그곳에 남겨 현지인이 한국과 고려대를 두고두고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했다. 전통가옥 모형을 만든 이정민(공과대 기계04) 씨는 “전시품은 출발 전에 만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부서질 위험이 있어 현지에서 제작했어요. 만드는 과정에 현지인도 참여해 더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고 말했다.

단원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함께 온 본교 이민구(의과대 의학과) 교수는 현지 노인에게 의료상담서비스를 제공했다. 지난달 2일엔 마을회관을 찾은 고려인 2세 율리아 할머니가 이 교수에게 진료를 받고 있었다. “4~5년 전 사냥을 하다 총알 파편이 튀어 머리에 박혔어. 그 이후로 골이 아파”라고 말하던 율리아 할머니는 마땅히 치료받을 곳이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상담을 마친 이 교수는 “몇 해 전 중국의사들이 봉사 명목으로 마을을 찾아와 비싼 값의 진료비를 챙겨갔다는 얘기를 듣고 안타까웠어요. 여건이 안 좋아 병원에 가지 못하는 할머니들을 이렇게 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고 말했다.

한민족, 또 만나길 희망합니다
바스호트 주민과의 만남은 생각보다 짧았다. 봉사단은 약 열흘간의 봉사를 마치고 지난달 3일 마을을 떠났다. 단원들은 마지막으로 마을주민에게 큰 절을 올렸다. 모두가 잘 지내라는 말만 남길 뿐 ‘다시 보자’는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한민족인 우리가 왜 한 국가에서 살지 못하고 떨어져 지내야 하는지 모르겠소. 이제는 말도 서로 잘 통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안타깝소” 마을의 큰 어른인 바바라 할머니는 기억 속의 한국말을 꺼내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만나 화목하단 것을 보여주니 너무 기쁩니다. 또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을회관은 온통 눈물로 어우러졌다. 학생들이 발을 떼지 못하자 사회봉사단 이환 과장은 “어서 차에 타자. 너희가 빨리 가줘야 이분들도 맘 편히 우릴 보내주지 않겠니”라며 다그쳤다. 하지만 그 역시 붉어지는 눈시울은 어쩌지 못했다.

마을 주민들을 뒤로한 채 봉사단을 태운 차가 눈밭을 달렸다. 창밖을 돌아보자 서로의 따뜻한 눈(目)길이 러시아의 차가운 눈(雪)길마저 녹이는 듯 했다.

글 | 윤지현(사범대 국교05)
사진 | 이정민(공과대 기계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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