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본교 신입생의 4분의 1이 외고 출신이라 한다. 진보언론은 외고 학생을 선호하는 대학을 강하게 성토하고, 대학은 “똑똑한 인재를 뽑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맞선다. 이런 뉴스가 나올 때마다 나오는 이슈가 고교 평준화 위기론이다.

흔히 학교의 평준화를 논하면 형평성을 지상가치로 여기는 평등주의자로 비치기 쉽다. 나아가 평준화 담론을 대학으로 끌어와 대학 평준화를 이야기한다면 ‘결과의 평등’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실 자유경쟁의 순기능을 강조하는 보수주의도 역설적으로 평준화와 어울린다.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한 지자체에서 고교 평준화를 단행한 후 명문대 합격생 수가 많아졌다는 일화가 있다.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나의 위치가 어디’라는 ‘심리적 계급장’을 떼고 경쟁할 때 제 실력을 발휘하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장이 없으니 패자부활의 기회가 항상 열려 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일회적이고 일원적인 시험 성적이 오랫동안 능력의 지표로 작용하는 경쟁 방식 하에선 재도전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보수주의자의 눈에 비치는 비평준화 체제의 또 다른 문제점은 공급자 간의 경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문학교는 독·과점 공급자다. 등록금을 비싸게 받아도 우수한 인재들은 꾸준히 수요를 창출해줄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학교 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져야 하는데, 한 번 형성된 학교 간 서열은 잘 바뀌지 않는다.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지 못하는 학교가 명문학교를 따라가긴 어렵다. 경쟁 의욕을 상실하기 쉽다. 악순환이 계속된다. 독·과점의 폐혜이자 시장 실패다.

건전한 보수주의자는 올바른 자유경쟁의 전제조건으로 ‘공정하고 합리적인 룰’을 든다. 

평준화는 경쟁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기준과 룰을 합리화한다. 학교 타이틀이 아니라 사회와 시장이 요구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 풍토가 확립될 때, 평준화는 효율성도 고양시키고 정의와 형평성도 달성하는 경쟁시스템으로 승화될 수 있다.

학교가 평준화된다고 해서 개인의 경쟁 동기가 소멸하는 건 아니다. 평준화를 ‘효율성을 희생해서 정의와 형평성을 달성한다’는 식의 진보적 시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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