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역사의 발전과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국민저항권의 척도에서 올바르게 평가되고 있는 것이며 근·현대사에서 꾸준하게 추구되고 있는 자극독립과 민주발전의 방향타가 되는 것으로 지역이나 정파를 초월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1980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역사발전의 이정표를 확실하게 설정한 민중항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전근대사회에서 집권자는 언제나 미화되고 정당화되었지만 근·현대사에 있어서는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고 평가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본보기다.

해방과 함께 강요된 분단과 대립은 미·소에 빌붙은 남·북정권을 창출했고 그들은 냉전체제 속에서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다가 3년여의 비극적인 한국전쟁까지 연출했다. 그로부터 남·북의 정권들은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여 독재체제를 강화하였는데 한국에서는 이승만의 독재가 12년 동안 계속되면서 온갖 불법과 부도덕이 난무했다. 이에 학생들이 앞장서서 4·19 혁명을 일으켜 민주정부를 세웠으나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박정희·김종필 등이 5·16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 박정희독재정권은 빈곤타파, 안보태세 강화라는 미명으로 재벌 중심의 고도성장과 남북의 첨예한 대립 그리고 지역차별을 자행해 계층간의 위화감과 동서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독재자 박정희는 3선개헌과 유신독재를 계속하면서 영구집권을 획책하다가 10·26으로 피살되었다.

이에 당황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는 12·12군사반란을 일으켜 안개정국을 조성하면서 집권야욕을 채우려 하자 이에 정면으로 맞서 광주시민들이 처절한 항쟁을 전개했다. 박정희 정권에 강인한 투쟁을 전개해 온 전남대생들은 3일 동안 도심에서 시민들과 함께 민주성회를 마치고 신군부의 휴교조치가 있으면 전남대 정문 앞에서 모이자고 약속하고 정상수업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5·17 비상계엄확대조치와 함께 공수부대가 학교를 점령하자 약속대로 정문 앞에 모인 학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된 5·18은 학생들이 시가로 진출하면서 공수부대의 난폭하고 무차별적 만행에 분노한 시민의 합세로 가열되었다. 신군부의 하수인들인 공수부대의 살상행위는 평화로운 시민들을 무장하게 했고 자동차의 시위와 도청공격 작전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시민들이 비참하게 쓰러져 갔다.

5월 21일 밤에 도청을 접수한 시민들은 지도자들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계엄당국과 협상하고 시민군을 조직하여 치안과 질서유지에 나서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민통치를 이룩했다. 그러나 철저한 봉쇄정책과 무력진압을 계획한 신군부에 의해서 27일 새벽에 20사단과 공수부대의 병력 앞에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는데 계엄군의 공식집계에 의하더라도 사망·실종자 294명, 부상자 2,654명 연행자 6천여명이며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이 5명이나 되었다.

동학농민 혁명 계승·발전,, 국민 저항권 확립
 
지역이나 정파 초원해 올바로 평가해야

집권욕에 눈이 뒤집힌 신군부의 무력 앞에 처절한 상처를 입고 좌절을 겪어야 했던 광주시민들은 꺼지지 않는 항쟁의 불길을 계속 지폈으며 전국의 학생들과 민주 인사들은 광주를 찾거나 광주의 진상규명을 절규하였다.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이나 그의 후계자인 노태우는 날이 갈수록 증폭되는 압력 앞에 차츰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광주항쟁이 뿌린 민주의 씨앗은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의 피·눈물을 밑거름으로 싹을 틔우고 잎을 피워 열매를 맺어 1987년에는 6월 항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끈질긴 투쟁의 결과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세력을 국가반란죄로 법정에 세워 그들을 단죄하게 했으며 이어서 등장한 김대중 국민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80년 5월에 쓰레기차나 손수레에 실려 망월동에 묻혔던 5월의 영령들은 망월동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게 되었으며 참여정부를 등장시켜 개혁과 한반도의 평화공존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많은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의 계승·발전이었다는 것이다. 근대사의 서막인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궐기했다가 일본군의 무력 앞에 좌절되었지만 그 정신은 계승·발전되어 근·현대사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에 전개되는 민족운동과 민주운동의 구심력이 되어 한말의병이나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이후의 반독재·반분단 운동에 적극적으로 작용하여 드디어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광주시민의 항쟁은 국민저항권의 확립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근·현대사에서 역사와 국가의 주인공인 국민대중은 부당한 압력에 대하여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대항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실증해 주었던 것이다.

셋째,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장되고 존중되어야 함을 보여준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좌절을 딛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을 비롯한 외세에 대한 인식의 태도를 바로 잡았다는 것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의 정당성과 인류의 존엄성을 과시한 의로운 항쟁이므로 미국이나 우방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오히려 가해자요 탄압자인 신군부와 손을 잡아 우리를 짓밟는 데 방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역사의 발전과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국민저항권의 척도에서 올바르게 평가되고 있는 것이며 근·현대사에서 꾸준하게 추구되고 있는 자극독립과 민주발전의 방향타가 되는 것으로 지역이나 정파를 초월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