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면 새삼 발견하는 게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한데, 영화의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되든 아이는 아이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변하는 것은 아이와 접촉한 세계 그리고 아이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다.

브라질 감독 월터 살레스(Walter Salles)의 <중앙역> 역시 이런 경우다. 9살 소년 조수에는 그야말로 아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천진난만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너무 상투적이다. 아이를 백설 같은 순수 결정체로 규정하는 ‘아이의 신화’에 감염되지 않았다면 영화 속 조수에가 세태를 얼마나 서핑하듯 잘 타는지 감지할 수 있다. 조수에는 몰래 마신 술에 취해 주정을 하고, 허기를 참지 못해 한 행동이지만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돈을 버는 아이디어를 짜낼 줄 알며, ‘음담패설’도 곧잘 한다. 하지만 그는 아이다. 생(生)의 역동적 에너지로 똘똘 뭉쳐 있어서 엄청난 가능태(可能態)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가 세상과 접촉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바로 그들이 변할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그러므로 아이가 주연인 영화는 그와 ‘공주연(共主演)’인 어른을 잘 보아야 한다.
어머니를 잃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머나 먼 여로를 거쳐 아버지를 찾아가는 소년의 로드무비로 <중앙역>을 감상하면, 이 영화는 너무 싱거워진다. 영화의 포커스는 다른 주인공인 도라에 맞추어져야 한다. 조수에는 조명을 반사해서 그녀에게 포커스가 가도록 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가능태 덩어리 아이와 어른의 만남
 
상실에서 충만으로 승화하는 여정

 
중년의 독신녀 도라는 전직 교사로 리우데자네이루의 중앙역에서 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대필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그는 대필해 준 편지를 부치지 않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이레네를 불러 그것들을 읽고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아주 고약한 행동을 즐긴다. 일종의 ‘문화적 가학증(sadism)’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즐기면서 삶에 대해 지독한 냉소주의에 젖어있다. 가족에게 보내는 절박한 내용이 담긴 편지도 부치지 않은 그녀는 이레네의 말대로 “그러다가 천벌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 모른다. 게다가 도라는 자긍심이나 자애심 따위는 내팽개친 지 오래다. 그러잖아도 추녀라고 할 수 있는 외모에 화장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아, 조수에의 말대로 “여자 같지도 않다.” 옷은 대충 편한 대로 입고 다니며, 일상의 무료함이 자신의 삶이 된지 오래다.

그러던 어느 날, 도라는 조수에의 엄마 아나의 편지를 대필하게 된다. 아나는 그 날 중앙역을 나서다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조수에는 홀로 남게 된다. 도라는 조수에를 꼬여 자기 집에 데리고 간 다음 날 입양 중개 조직에 그를 팔아 넘긴다. 친구 이레네가 그런 조직이 사실 아이를 죽여 장기(臟器)를 밀매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자(“세상엔 해선 안 될 일이 있는 거야”), 양심의 가책을 느껴 조수에를 다시 찾아오고,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함께 여행을 떠난다.

이 괴상한 짝의 여정은 어려움의 연속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찾겠다는 조수에의 희망은 꺾이지 않는다. 사실 9살 박이 아이에게는 희망의 의지가 따로 필요 없을지 모른다. 미래를 향한 아이의 삶은 그 자체로 희망의 날개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변화는, 대필한 편지를 쓰레기통에 장례 치름으로써 타인의 희망조차 묵살하는 ‘이미 종 친 인생’ 도라의 삶이 희망의 신음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쾌유를 향한 몸짓이다.

도라와 조수에가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곳은 새로 개간된 오지(奧地)로 사람들이 ‘세상 끝’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조수에는 아버지를 찾지 못하지만 이복 형들을 만나고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곳에 남는다. 이제 홀로 남은 사람은 도라다. 그녀는 자기 삶의 전장(戰場)으로 돌아가야 한다. 온갖 인간군상들이 운집해 모든 사건들이 교차하며 희망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중앙역’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오지를 떠나는 날 새벽, 도라는 새 삶을 위한 출정식을 하듯 립스틱을 바르고 조수에가 사준 보라색 꽃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세상 끝’을 떠나 세상의 중심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조수에와 며칠 간 함께한 이 짧고도 긴 여정은 도라의 새로운 성장기였다. 그래서 영화는 도라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세상, 사건, 변화 그리고 아이들’의 의미를 다시 짚어 본다. 가능태의 덩어리인 아이와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해, 현실태로 굳어 버린 어른은 자신이 역으로 소급 응축돼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미’의 위치에서 ‘아직’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변화를 위한 가상적 시간의 이동이다. 하지만 일상의 삶에 실효를 발휘하는 경험이다. 다른 한편으로 변화를 위해서는 공간적 이동도 필요하다. 중심(중앙역)에서 벗어나 변방(세상 끝)으로의 여행이 필요하다.

또한 신비로운 세계의 뒷면을 돌아보는 여정도 필요하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종교적 신비의 분위기 속에서 진행한다. 온갖 희망을 신앙의 그 질긴 줄에 거는 속세의 사람들이 줄곧 도라와 조수에의 여정을 따라다닌다. 놀랍게도 그들의 신앙이 전하는 ‘복음’은, 신은 진리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진리를 소유하지 못해서 진리를 그리워하는 그래서 변화가 필요한 존재이다.

도라는 이 모든 것의 메신저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추녀의 연기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장면, 먼 기억 속 자신의 분신인 조수에에게 편지를 쓰며 눈물 속 미소짓는 그녀는 너무 아름답다. 그것은 뭔가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냉소주의에 빠지면, 모든 것이 웃긴다. 하지만 생의 의미를 재발견하면 “모든 것이 그립다.” 이것이 도라가 쓴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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