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은 모르지만 촘스키의 변형생성 문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별로 긍정하지 않는 얘기이다. 약간의 세대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처음 영어를 배울 무렵이 아니었던가 싶다. 어떻게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동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러저러한 경로로 주워 들었던 “빛이 있으라”와 같은 식의 문장에 대한 의문. 어떤 식으로든 의미는 와 닿지만 이거 비문(非文)같은데, 하는 식의. 내가 아는 외국어 지식의 절대 다수는 서구의 언어, 영어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불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가 고작이지만 개인적인 지식의 한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외부’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서구’라는 범주와 비슷하게 사용된지 오래이므로. 내가 아는 이 서구어들의 대부분은 동사에 대한 강조를 공통 분모로 하고 있고, 그러므로 시간과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동사의 변형과 뉘앙스에도 마찬가지의 무게를 둔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언어적인 특성으로 보이는 것들이 세계에 대한 시각까지를 한정할 때이다.

공용어인 스페인어 외에 수십 가지의 다양한 원주민 언어 사용자들에 대해서 입장을 마련해야 하는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입장은 그래서 때로 어렵다. 유럽의 신대륙에 대한 야심이 실행되기 이전부터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와 세계관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해 타자(他者)로 읽히는 사람들의 언어와 관련된 세계관은 우리와 참 비슷한 게 많다. ‘나’와 관련된 소유 형용사를 잘 쓰지 않고 ‘우리’를 선호한다거나, ‘존재’를 뜻하는 말이 명령어가 되기 어렵다는 것 등.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자국 민족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응집의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는 멕시코와 같은 나라에서는 원주민(여기에는 번역의 어려움이 있다. 스페인어로는 그냥 인디헤나indigena라고 쓴다)들의 문화와 기존의 지배 문화가 공존하는 것에 대한 기존 지배 계급들의 우려가 있다.  이에 맞서, “멕시코는 여러 문화의 통합과 공존이라는 바탕 위에 세워진 국가”라는 것이 단순한 수사(修辭)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치적인 권력까지를 사회적으로 수용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비판적인 세력의 입장이다.

주말이면 길모퉁이 곳곳에서 옛날 아스테까인들의 복장으로 차려 입고,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퍼포먼스를 벌이는 원주민 후예들의 소리를 들어 보자. “우리(원주민)가 없으면 멕시코 사람들(그들은 자신들을 현대적인 의미로서의 멕시코인들과 분리시킨다)은 어떻게 깨끗한 화장실에서, 정돈된 정원에서 살 수 있단 말인가.” 말하자면, 이들 원주민들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멕시코를 유지하기 위해 이 사회를 지탱해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예로 들어 보면 쉽다. 맞벌이를 하는 어떤 집안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쓴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태생적으로 교육의 기회와 사회적인 신분 상승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남의 집살이’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또한 길거리에서 차유리나 닦거나 운전자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다 추위에 얼어죽을 운명으로(이 또한 영어식 문법에 익숙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서 가정부를 쓴다고 했을 때보다도  계급적인 가치와 능력이 형성되는 길이 더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좀더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사빠띠스따 운동이 사회적으로 큰 공감대와 성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주도적인 지배 문화와 다른 것에 대한 인식과 인정에도 불구하고 아직 멕시코 사회에는 이들을 공존할 수 있는 주도적인 문화를 가진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하고 멋진 수사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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