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드>와 <화이트>에서였던가. 한 장면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다. 거리에 비치된 거대한 쓰레기통, 그 앞으로 다가가기 위해 한 노인이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발걸음을 떼던 바로 그 모습. 영화의 배경으로 비추어진 하나의 그림이었을 뿐인 이 장면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것은, 육체의 노화와는 대조적으로 늘 푸르게 흐르고 있을 그 노인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음이란 좀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의 나이는 늘 현재 진행형이다. 반면, 육체의 나이는 한두 해를 거듭할수록 세월의 두께를 드러내고 사람들은 그로부터 과거의 흔적을 찾아낸다. 우리는 이 이율배반에 매우 익숙해 있다. 마음의 나이와 육체의 나이간에 존재하는 모순이 부당하다고 때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대체로 그 모순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제도적으로 관습적으로 강화하기도 한다. 물론 대개 그 결과는 육체의 나이에 손을 들어주고 마음의 나이를 억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육체에 대한 억압이기도 하다!
노인의 성과 사랑, 아마 이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동안 억압되어 온 타자였을 뿐, 공론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최근 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고, <죽어도 좋아>와 같은 영화가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런 데에는 어느 정도 한국사회가 점차 고령화되어 갈 것이라는 공감대의 확산도 한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성신의 'Love Festival' 네 번째 작품인 <늙은 부부 이야기>(오영민 작, 위성신 연출)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연극은 어느 봄날 박동만 할아버지(손종학 분)가 예전 단골 국밥집 주인이었던 이점순 할머니(김담희 분) 집에 세를 들기 위해 찾아온 것으로 시작된다. 물론 박동만은 이점순을 오래 전부터 맘에 두고 있었고 그녀가 월세를 내놓았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찾아왔던 것이다. 여기에 박동만은 상처한 지 20년, 이점순은 남편과 사별한 지 30년이 되었다는 정보가 추가되고, 멋쟁이 할아버지의 느물거림과 욕쟁이 할머니의 뻣뻣함이 충돌하면서, 이 연극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는 로맨틱 코미디임을 직감케 한다. 육체의 나이로 잠가두었던 자물쇠를 열고 그네들이 뿜어내는 싱그럽고 예쁘고 따뜻한 사랑을 보는 것이 마냥 즐겁다. 그러나 이 로맨틱 코미디는 그 해 여름으로 짧게 끝난다. 가을에, 이점순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고, 겨울에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박동만의 쓸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나고 사랑하다가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이야기, 이 평범한 서사에 두 배우의 자연스런 연기와 극의 리듬을 적절히 조율한 연출이 더해지면서, 관객은 이 사랑이야기가 특별한 것이라는 점을 잠시 잊게 된다. 이 연극의 강점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노인의 성과 사랑이 특이한 구경거리가 아닌, 일상적인 영역에 놓여 있음을 정서적으로 설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점 또한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 정서적 동의가 가족이 거세되고 사회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 즉 현실의 갈등요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공간으로부터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연극은 지극히 사실주의적이면서도 일종의 환타지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의 미덕은 반감되지 않는다. 노인의 사랑이야기를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설득하는 시도조차 소중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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