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대박난 <악마를 보았다>, <아저씨>같은 영화에서는 한 시민이 잔인하고 처절한 싸움을 통해 사회 정의를 지킨다. 몇 년 전 대박난 영화 <괴물>에서도 거대한 괴물과 사투를 하는 주체는 시민이다. 이런 영화들이 대박나는 사회적 배경에는 우리 사회에 정부, 법, 공권력이 있으나 이것들이 우리 가족의 안녕과 사회정의를 지켜주는 보루가 되지 못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다.

요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하버드 교수의 책이 베스트셀러인 이유도 과연 우리 사회에 정의란 것이 존재할까라는 의문을 가진 시민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나라 국민은 여전히 우리 민주주의 정부와 법과 공권력을 불신하고 있다. 이러한 불신감이 영화속에서 한 시민영웅을 통해 투영되어 폭발하는 것이고, 외국 석학의 강의와 책을 통해 불신감 극복을 모색해보는 것이다.

과연 우리사회에 정의가 존재하는가? 정의를 판가름하는 법원에서 정의가 있는가? 또한 정의를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진리와 정의가 존재하는가? 성상납뇌물 검사 사건과 정부 각료후보자에 대한 청문회에서 각각 드러나듯이 우리 사회에 좀 잘났다는 인물들은 거의 다 불법, 비리 백화점과 같다. 검찰, 법원, 대학교에서조차 깨끗한 사람이 별로 없고 공정한 사람도 드물다. 그래서 국민이 가장 불신하는 직업이 국회의원, 정치인, 기업인, 검사, 세무사, 공무원, 시민단체 활동가, 목사, 변호사, 기자, 보험과 부동산컨설턴트, 증권업종사자라고 하니, 우리 사회의 정의와 공정성 수준은 측정하지 않아도 빤한 수준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법과 정치는 정치, 권력, 돈, 인맥에 의해 너무 많이 휘둘리고 있다. 사회정의가 있다고는 하지만 정의는 교과서와 수사적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정의를 위한 올바른 목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는 사회이다. 정의의 목소리는 그 용기가 순간 반짝이며 환영받는 듯하나 곧 권력과 정치에 의해 억압되거나 보복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덧 우리는 주위의 눈치를 보고 스스로 알아서 기는 자기검열의 방법을 교양으로서 학습화하면서 소시민이 되어간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우리 사회에선 여전히 거룩한 어록이며, 시민은 패배주의 냉소주의에 빠져 있다.

떠나고 싶은 국민이 가장 많은 나라, 세계인들이 이민가기 가장 싫은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대통령도 이제와서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보겠다고 외치지 않는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미 해먹을 사람들은 다 해먹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외침이 기존의 불공정성을 고착화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정의롭고 공정한가? 그리고 우리 대학도 그러한가? 그리고 대학에서 여전히 정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이를 강요할 것인가? 학생들이 이런 질문들을 내게 한다면 나의 대답은 ‘노우’이다. 우리 사회와 대학에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엄연히 존재하는 한, 나는 이상보다는 현실을 말하겠다. 이상에 대한 고민과 연구는 교수 혼자 해도 충분하다. 더 이상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보일 순 없다. 학생들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이상론을 펼쳐서 그들이 비현실주의적 사회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상과 현실을 적당히 타협하는 기회주의자가 되거나, 철저히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이 험난한 사회의 생존부에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 중간에 언급한 우리 국민이 불신하는 직업들은 대부분 인기있고 돈도 잘 버는 직업이란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국민이 가장 불신하면서 가장 갖고 싶은 직업인 것이다. 마치 대학생때 삼성을 가장 싫어하는 기업이라고 비판만 하다가, 졸업후 가장 가고 싶은 직장이 삼성이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런 사고와 태도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우리 사회에 딱 맞는 가장 이상주의적이고 가장 현실주의적인 학생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정의는 없다. 정의의 이상은 대학과 영화 속에나 있는 것 같다.

현택수 인문대 교수·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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