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전이 즈음한 연세대학교 앞에 널려진 현수막들은 가관이었다. “고대는 연대의 기쁨조”, “바보는 99%의 고대생과 1%의 고대지망생으로 구성된다”. 그중 압권은 “고대가 이긴다 by 펠레”. 아, 한창 김연아 선수가 활약하고 대통령에 대한 반대여론이 만만찮을 때에는 이런 것도 돌았었다. “너희에겐 김연아가 있지만, 우리에겐 이명박이 없다”. 눈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안암동 일대와 고려대학교 앞에도 현수막의 색깔만 크림슨색으로 바뀐 각종의 비아냥과 질시, 선동이 펄럭였을 터이다. 붉은 기조의 만장이 쫘악 깔려있을 것이니 시각적으로는 이쪽이 더 드세 보일 것이다.

해마다 추석 무렵의 이 치졸함은 유쾌하고 즐겁다. 양교의 선후배, 학생들 뿐만 아니라 민폐만 없다면야 주변의 시민들도 젊은이들의 이런 치기들을 아량으로 웃어넘길 것이다. 살다보면 선의의 앙숙들이 투닥투닥하는 꼴을 많이 보게 된다. 회사에서 나의 끼니를 잇게 해주는 재무부서와 업무 속성상 자주 부닥치게 되는 기획부서도 그런 꼬락서니다.

“파워포인트로 그림만 잔뜩 그려서 뭐할려고? 추세 파악을 직관으로 하시나?” vs

“숫자무더기만 이렇게 보여주는게 무슨 소용이야? 엑셀로 표만 잔뜩 그려놓고 말야”

앙숙들 서로에게 선의의 바탕이 깔려 있으려면 각자의 형성과 발전 과정이 공정해야 하고 그 결과치가 대등해야 한다. 그런 앙숙들은 각자의 가치 뿐만 아니라 그네들이 소속된 사회의 가치 또한 상승시킨다. 그렇지 않다면? 불공정과 불평등이 양 진영의 성숙 과정에 개입된다면? 단적으로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중 한쪽에는 과도한 특혜가, 한쪽에는 터무니없는 푸대접만 수십년간 퍼부어졌다면? 앞서의 저런 야유를 웃어넘길 여유는 없다. 그들은 증오와 상호 멸절의 대상이 된다. 르완다의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홀로코스트가 괜시리 벌어진 게 아닐 것이다.

‘똥돼지’라는 열쇳말이 떠돈다. 유명환 장관과 그 딸의 돈독한 부녀관계에서 비롯된 말인데, 뒷배경이 든든하여 여러 좋은 지점에 낙하산으로 착지하신 자제분들은 ‘똥돼지’라 불리고 그들의 부모는 ‘흑돼지’라 불린단다. 그저 자기 스스로의 비계와 육질을 개량해서 상등품이 되고자 하는 보통의 돼지들과 ‘똥돼지’들은 애초부터 앙숙이 될 사이가 못된다. 날 때부터 품종이 다르고, 자라면서 먹는 사료가 다른데 서로에게 선의가 깃들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선의는 고사하고 분홍빛 보통 돼지떼들의 적의 어린 꿀꿀거림만 도처에서 떠돌 것이다.

진정성이 있든 없든 작금 떠오른 ‘공정한 사회’ 의제는 천국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선의의 앙숙들이 많아지게 하는 정상 사회의 최소 기반을 다지는 것 뿐이다. 불공정이 야기하는 수많은 피해자들의 적개심과 체념이 만연한 곳은 지상의 지옥이다. 특정 지역과 계층을 차별과 멸시로 배제했던 독재정권 시대를 ‘불공정이 불가피했던’ 희망의 연옥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헛소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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