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철사’를 가지고 만지작거리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몇 번 구부리다 펴다를 반복하다 보면 철사는 손에 쇳내만 가득 남긴다. 물이 닿아 녹이라도 슬면 끈적끈적한 액체를 남기며 흉하게 변해버린다. 이런 철사를 두고 뉴욕의 한 조각가는 이렇게 말한다. “철사가 녹슬 때, 생명을 다하는 것 같은 그 모습마저도 너무 좋습니다”

더위가 한창이던 7월 26일, 고대신문은 철사 꼬는 한인 아티스트‘존 배(John Pai)’ 씨의 초대로 코네티컷(Connecticut)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뉴욕에서 북쪽 방향으로 두 시간 가량 달리자, 기자단을 먼저 반긴 것은 그림 속에나 나올법한 넓은 정원과 그 끝을 감싸 돌아 흐르는 시냇물이었다. 예술 같은 경치를 뒤로 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진짜 예술은 그 안에 있었다. 1700년경에 지어진 집 안 곳곳엔 존 배 씨가 만든 작품이 가득했다. 1cm짜리 철사를 이어 만든 작품이나 긴 철사를 휘거나 쌓아올려 만든 그의 작품들은 주위의 다른 골동품과 어우러져 마치 화랑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줬다.옆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미소로 존 배 씨는 “어서오세요”라며 기자들을 반겼다. 그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1949년 11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왔다. 이후 그는 산업디자인을 배웠고 뉴욕의 프랫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 대학에서 최연소 교수로 임명됐다. 그리고, 칠순을 넘긴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로 활동 중이다.

거실 곳곳에 놓인 그의 작품을 하나씩 감상했다. 기자는 손 가는 데로 휘어진 듯한 철사 작품을 바라보다 의문이 들었다. 작품을 만들기에 앞서 계획한 틀이 있느냐는 질문에 배 작가는 조금이라도 뒤틀리거나 변색되면 작품이 완성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하나만 변해도 전체작품이 달라집니다. 음악에서 하모니가 중요한 것처럼 철을 어떻게 조화롭게 조각하느냐가 항상 고민이고요. 그렇게 최고의 조화를 이루며 완성된 작품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두 다른 느낌이 들게 됩니다” 평생 철사와 함께 해온 만큼 그의 철사 사랑은 기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배 작가는 철사에 대한 예찬론을 이어갔다. “철사만큼 매력적이고 좋은 물질은 없어요. 철은 물에 닿으면 변질되지만 내가 원하는 모형대로 만들 수 있거든요.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손닿는 대로 휘어지는 철의 특성이 매력적이에요” 사실 배 작가가 작품의 소재로 평생 철사만 고집 했던 건 아니었다. 학생 땐 플라스틱이나 돌을 소재로 작품활동을 했었지만 철사만한 것이 없었다. 플라스틱은 물이 닿아 딱딱하게 변하면 독이 발생했고, 돌이나 알루미늄 조각에도 도전해봤지만 한계에 부딪쳤다. 철은 비싸지도 않고 부서질 걱정도 없어 그가 원했던 이상적인 소재였다.

그의 주 무대는 뉴욕이지만 간간히 한국에서도 활동을 한다. 지난2003년엔 10년 만에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후엔 3년에 한 번 한국을 찾아 국내 팬들을 만난다. 존 배 씨는 양국에서 전시회를 열며 화랑 문화의 차이를 느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화랑에서 작가와고객이 직접 만나는 것을 원치않아작가는 누가 자신의 작품을 사갔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미국에선 작가와 고객 간의 1대 1 관계가 중요시 돼 고객과의 지속적인 친분이 이어진다. “미국에선 나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나 구입한 사람과는 계속 친분을 유지하게 돼요. 하지만 한국에선 누가 내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지 못해 답답할 때가 있어요”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74세 할아버지 조각가에게서 소년의 수줍음과 지지 않는 열정이 묻어났다. 할아버지 손에서 태어난 철사는 더이상 차갑거나 딱딱하지 않고, 오히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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