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맛나는 노래로 큰 인기몰이를 하며 스타덤에 오른 가수 UV(출처=유세윤 미니홈피)

옛 여자친구의 미니홈피를 기웃거리고, 그녀에게 자꾸 0번이나 1004번으로 문자를 보낸다. 쿨한 옛 연인에게 끈덕지게 전화를 하고, 왜 자신이 사준 전화기를 바꿨는지 계속해서 궁금해한다. 그룹 UV의 '쿨하지 못해 미안해'의 노래내용이다. 헤어진 옛 연인을 애절하게 그리워하거나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거나, 혹은 '잘 헤어졌다'며 멋지고 아름답게 이별을 표현하는 기존의 이별노래와는 사뭇 다르다. '쿨못미' 속 주인공은 시종일관 이별에 대해 소위 말하는 찌질한 태도를 보인다. 네티즌은 그룹 UV를 '병신같지만 천재적'이라며 '천재뮤지션'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최근 대중가요시장에서 '병맛'나는 노래가 큰 인기를 받았다. 지난 여르, 노라조의 노래 '카레'는 맥락없는 가사 내용에 갑자기 '타지마할'이나 '샨티샨티'같은 무의미한 단어를 넣거나 뜬금없는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며 대중을 폭소케 했다. 그룹 UV는 익숙하거나 엄숙하게 여겨왔던 이별과 사랑을 '병맛나게' 표현했다. 획일적인 아이돌 생산 시스템에서 답답함을 느낀 대중에게 이들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임진모 대중문화평론가는 "UV는 틀에 박힌 음반시장에 신선한 린치를 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밝혔다.

MBC의 '쇼! 음악중심'에서 선보인 노라조의 '카레' 무대.


인터넷에 만연한 '병맛'이라는 비속어는 최근 대중문화 속에 녹아들었지만 하나의 뜻으로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병신 같은 맛'의 줄임말인 병맛은 인터넷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에서 처음 등장한 후 인터넷문화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주로 콘텐츠가 저급하고 무의미할 때 사람들은 '병맛난다'고 표현한다. 단어의 기원인 '병신'이라는 비속어에서 알 수 있듯이 비하와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칭찬이나 찬양의 의미도 담고 있다. UV가 '천재뮤지션'이란 별명을 얻은 것도 그런 이유다.

저급한 상황과 무의미한 내용이 '병맛 콘텐츠'의 기본요소지만 수용자와의 공감이 없인 병맛이 성립하지 않는다. 공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비도덕적인 행위이거나 정말 비정상적이고 말도 안되는 일일 뿐이다. 디시인사이드에 '병맛의 정석'을 그린 '덕광후'는 "병맛이라는 의미는 병신 같다며 대상을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듯 하지만 그것에 웃어버린 자신의 멋쩍음이 담긴 말"이라고 말하며 "수용자가 콘텐츠의 내용에 공감할 때 비로소 병맛의 의미가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비평가 진중권 씨는 자신의 저서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한국의) 사방으로 깔린 망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1인칭-3인칭의 '정보'가 아니라 1인칭-2인칭의 '교류'"라고 밝혔다.

최근엔 병맛의 범위가 글, 칼럼, TV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대중가요까지 확장했지만 '병맛'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인터넷 만화다. 이들은 대충 그린 작화체와 기승전결 구조가 아닌 '기승전병' 혹은 '기승병병' 식의 플롯을 가진다. 이들 만화에선 찌질한 주인공이 등장해 사회의 부조리한 상황이나 일상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이말년의 '이말년씨리즈', 조석의 '마음의 소리', 귀귀의 '정열맨'이 대표적이다.

네이버 인기 연재만화 조석의 '마음의 소리'(출처=네이버 웹툰)


이말년의 '이말년씨리즈'의 첫화 '불타는 버스'에선 영화 실미도를 패러디해 당시 사회상황을 재밌게 비꼰다. 버스 승객이 요금통에 담배꽁초를 넣어 버스가 불탄다. 아이들은 버스가 소독차인 줄 알고 따라오며 승객과 버스 운전자는 불을 끌 생각을 않는다. 갑자기 한 승객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고 말하자 버스 운전자는 "그래야 내 손님답지"라며 비장하게 청와대로 돌진한다. 경찰버스가 겹겹치 쳐진 'XX산성'에 이른 그들은 다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소위 '언더 병맛 만화'는 풍성한 19금 소재로 더욱 과감하게 고정관념과 일상의 도덕관을 비튼다. 이 중 대표적인 소재는 성(姓), 배은망덕, 폭력과 같은 것이다. '19금 병맛'은 사회의 금기와 웃음을 결합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학습 받은 도덕적 테두리에서 잠시 벗어나는 듯한 일탈감과 해방감을 주고 짜릿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이영진(문과대 한국사09) 씨는 "병맛 문화는 한 번 시원하게 웃고 잊어버리는 배설 기능을 한다"며 "한편으론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말했다.

병맛을 심도있게 탐구한 '덕광후'의 '병맛의 정석' (출처=디시인사이드)


언론과 평론가들은 이러한 병맛 문화를 20대 세대론과 연결 짓는다. 소위 88만원 세대로 표현되는 20대의 패배감과 무력감이 병맛만화에 공감하는 이유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병맛과 20대의 루저문화, 패배주의 정서를 연결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입장도 있다. 인터넷에서 병맛을 생산하고 체험하고 즐기는 수많은 사람을 단순히 20대라는 연령적 카테고리로만 묶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만드는 병맛문화를 20대 루저문화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또 다른 세대론이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대학원 석사 논문으로 <우리는 디씨>를 쓴 이길호(남˙30세) 씨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기성세대는 세대론이라 말하며 밑의 세대를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병맛에 담긴 여러 양상을 특정 연령집단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틀로 포섭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콘텐츠 자체의 무의미함이 특징인 '병맛'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역설이라 한다. 인터넷 공간과 문화의 빠른 흐름에 익숙한 20대는 복잡한 것을 거부하고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단순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이성적인 판단을 선호하지 않는다. 김무연(문과대 사학07) 씨는 "머리로 생각할 필요없이 예기치 못한 반전이 있는 '기승전병'이 젊으 세대에 더 어필하는 것 같다"며 "실제로 병맛 자료들을 보고 웃어 넘길 뿐"이라고 말했다. 이길호 씨는 "당장 병맛을 향유하는 이에게 너의 행동은 이러한 사회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봤자 상대는 '그것 참 병맛같은 소리군'이라 코웃음 칠 것"이라며 "현실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병맛에 단순히 대응시키는 것은 병맛을 왜곡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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