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잠이는 방학만 되면 재학생 커뮤니티 사이트를 온종일 기웃거린다. 성적표가 배송되었다는 소식을 최대한 빨리 알기 위해서다. 스쳐가는 오토바이 소리만 들려도 집배원이 아닐까 촉각을 곤두세운다. 오랜 잠복 끝에 가까스로 성적표를 회수하지만 부모님이 포탈사이트에서 자녀의 학번과 주민등록번호만으로 성적을 조회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들린다. 고잠이의 부모는 인터넷으로 학생의 성적을 조회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다. 성적조회는 포탈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아야 가능하다. 이를 알지 못하면 집으로 오는 성적표를 통해서 성적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단과대 학사지원부에 연락해 성적을 문의할 수도 있지만 성적은 개인정보로 취급 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알려주지 않는다. 정경대 학사지원부 직원 추희정 씨는 “자녀의 성적을 알고 싶다는 문의를 받으며 일단 학생에게 물어볼 것을 권한다”며 “특수한 경우가 인정될 때에만 확인절차를 거쳐 성적을 알려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학사경고처럼 학생관리차원에서 학부모가 알아야 한다고 판단되는 사안은 학사지원부에서 직접 연락을 한다.

성적표는 포탈사이트(portal.korea.ac.kr) 개인정보란에 등록된 부모의 주소로 발송된다. 학적·수업 지원팀 이주리 과장은 “27년전에도 성적표를 집으로 발송했다”며 “아마 더 오래전부터 발송해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적표를 발송하기 시작한 시기가 모호하다 보니 그 이유도 상식적인 선에서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 학생은 집으로 발송되는 성적표를 감춘다. 우편함을 지키다가 집으로 발송되는 성적표를 숨기는 것이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본인의 집이 포함된 지역을 담당하는 우체국 배달원에게 연락을 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의 주소를 친구의 집 주소로 변경해 수령경로를 바꾸려는 학생도 있지만 이는 사실상 힘들다. 부모주소를 변경 하려면 학사지원부에 주민등록 등본을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의사소통 부족과 인식차
왜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쫓고 쫓기는 성적표 전쟁을 해야하는 걸까? 성적표를 숨기려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성적이 부모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송 모(인문대 인문사회10) 씨는 지난 학기에 평점 3.75점 이상을 받아 성적표 비고란엔 ‘우등생’으로 표기가 됐지만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않았다. 송 씨는 “부모님 주위에 장학금을 받는 ‘엄친아’가 많아 내 성적에 만족하지 않으신다”며 “어떤 결과가 나와도 다른 사람과 비교당하는 게 싫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부모와 자녀 간에 소통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부모는 주로 이중구속 메시지(Double bind message)를 사용한다. 성적이 나빠도 혼내지 않을 것을 약속해놓고 성적표 확인 후 언짢은 반응을 보이거나 혼을 내는 경우다. 이중구속 상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자녀들은 성적표를 공개하든 공개하지 않든 상황이 본인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아예 성적표를 공개하지 않는다. 세리자녀상담센터 최세환 원장은 “부모와 자녀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소통작용이 부족하면 자녀는 부모에게 불신을 갖고 학업성취 결과를 숨기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성적에 대한 부모와 자녀의 인식이 다른 경우도 있다. 부모는 부모로서 당연히 알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반면, 자녀는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해 성적 공개를 강요하는 부모에게 반발하는 것이다. 최 원장은 “성적을 일기처럼 개인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성적표를 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성인이 된 자녀에게 간섭은 NO?
부모가 자식에게 ‘투자’를 하고 관리 하는 시대다. 이렇듯 과거에 비해 과도하게 높아진 부모의 관심이 성적표를 둘러 싼 자녀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또한 현재 대학생의 부모세대는 시장에서 한창 활동하는 세대인 것도 한 요인이다. 치열해지는 취업시장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성적을 본 후 자녀가 성공할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서용석(인문대 사회학과) 교수는 “요즘 대학생은 부모에게 집중 투자를 받게 된 제 1세대”라며 “관심이 커질수록 투자 결과에 대한 기대감도 커져 자녀의 성적을 확인하려는 욕구가 강해진다”고 말했다. 본교생의 학부모인 홍 모(남·50) 씨는 “성적도 일종의 성과라고 생각한다”며 “자녀가 다른 아이들보다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거뒀는지 확인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학생이 성적에 당당해지려면 자립심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떠먹여 주는’ 생활에 익숙해진 대학생들은 부모의 지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의 자율성을 박탈하는 교육형태 역시 문제다. 어릴 때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받은 자녀는 수동적으로 자라기 마련이다. 서용석 교수는 “사회적으로 자녀의 수가 줄어들면서 자녀에게 쏟는 관심이 커졌다”며 “이러한 집중적 돌보기(intensive care)는 부모가 모든 것을 제공하게 해 자녀의 자율성을 북돋아 주지 못 한다”고 말했다. 자녀가 본교 미디어 학부에 재학 중인 김 모(여·47) 씨는 “대학생 정도의 나이면 본인의 일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학부모는 자녀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일러스트-정현정 촉탁기자 ▲ 일러스트-정현정 촉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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