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힘으로 두 자식을 기르던 한 ‘엄마’가 불의의 사고로 온몸에 2도 화상을 입었다. 피부가 녹아내린 그녀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아이들을 볼 생각뿐이었지만 아이들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아이들이 엄마를 무서워할까봐 두려웠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조금 아프다고만 했다. 며칠후, 엄마를 처음 본 아이들은 ‘징그럽고 무섭다’며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얼마 전 <한겨레21 - 생명OTL 특집>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10살 가량의 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엄마에게서 한사코 떨어지려고 했다. 병으로 수척해진 엄마가 ‘무섭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야속했다. 겉으로 보기엔 무섭고 초라하지만, 거기엔 병으로 고통받는 엄마가, 자신들을 사랑하는 엄마가 있는데 왜 그걸 보지 못하냐고 나무라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비난할 순 없다. 눈에 보이는 초라함, 누추함 너머의 고통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가끔 주변에 노숙자들, 도시 빈민, 불우한 아이들, 생존을 위해 파업을 외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바라보거나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화려함과 예쁜 것들을 좇아서 즐기기도 바쁜 이들에겐 누군가의 초라함이나 가난함, 누추함을 신경쓰는 건 귀찮은 일이다. 살다보면 으레 마주치게 되는 누군가가 어떤 고통을 받는지는 상관없다. 눈을 돌리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즐기고 싶은 것만 즐기면 그만이다.

2011년이 왔다. 주변에선 한 살씩 더 먹었다고 호들갑이다. 보톡스 주사를 맞거나, 각종 과학기술의 힘을 빌리는 등 ‘어려보이려는’ 노력이 치열하다. 하지만 ‘어른스러워지려는’ 노력은 어떠한가.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나이 먹는 게 그렇게 피하고 싶기만 한 일일까. 나이에 맞는 어른스러움을 갖춘면 그렇게 호들갑떨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우리는 누추함을 외면하는 나이만 먹은 사람인 가, 누추함을 끌어안는 나이값을 아는 사람인가. 새해는 벌써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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