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도자기’라고 하면 ‘고려청자’가 떠오르고, ‘중세 유럽’이라고 하면 ‘고전주의’가 떠오릅니다. 당장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새천년의 첫 10년이 끝났습니다. 고대신문 문화부에서 10회에 걸쳐 <문화 들여다보기>를 연재합니다. 각 분야 전문가의 눈을 통해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의 드라마 / 영화 / 미술을 통해 각 시대를 들여다봅니다.

 남파된 북한 무장간첩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저항하다 죽음을 당한 ‘반공소년 이승복’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배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1970년대에 ‘반공’이 정치권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되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1972년 비상계엄령 하에서 치러진 국민투표로 출범한 유신 정권이 1979년 10‧26으로 막을 내린 뒤에도 ‘반공’은 오히려 국민 통합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만큼 여전히 강력했다.

말이 좋아 ‘국민 통합’이지, ‘반공’과 ‘계몽’의 실상은 사상의 자유를 말살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지배 도구라 해도 무방하리라. 여북했으면,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이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대한민국 국시(國是)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러야 했었을까? ‘국시’ 논쟁은 물론 유신 정권이 몰락한 1986년도의 일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반공’이 여전히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당연히 그래서였을 것이다. 1970년대 드라마에 반공과 계몽의 DNA가 새겨진 것은, 국민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반공드라마’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수사극(搜査劇)’의 형식을 빌려 ‘간첩잡기’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았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방영되었던 KBS의 <실화극장>은 ‘북괴의 만행과 잔혹상 그리고 우상 체제 폭로를 주요 내용으로 “숨겨주는 인정보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와 같은 간첩신고를 계몽하는 대표적인 반공드라마였다.

MBC에서도 1973년 1월 <자유무대로>로 시작한 반공드라마를 같은 해 10월 <113수사본부>로 확대한 뒤 ‘한국판 첩보물’을 자임하면서 1983년 10월까지 방영하였다. 1980년 언론통폐합 당시 없어진 TBC 역시 1975년 10월 <추적>이라는 제목의 반공드라마를 통해 ‘대공(對共)’ 형사들의 활약상을 담아냈다. 이처럼 남과 북의 대치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간첩사건’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반공드라마들은 남한의 체제 우월과 발전된 사회상을 강조하면서 유신 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파 간첩’에 초점을 맞췄던 반공드라마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6월 ‘영웅 이야기’로 첫 선을 보인 <전우>가 방영되면서부터였다. 6‧25한국전쟁에 참전한 부대원들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극적으로 형상화한 <전우>는 ‘전쟁드라마’의 전형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대립적 시선을 유지함으로써 여전히 ‘반공드라마’의 틀에 갇혀 있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6‧25한국전쟁의 실상을 다룬 드라마들이 ‘반공’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단 상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대중들은 그렇게 ‘반공’과 ‘계몽’의 DNA가 새겨진 드라마를 통해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다. 그때 그 시절은 그러했다. 드라마를 정치권력의 헤게모니 장악용 지배 이데올로기 강화 도구로 이용하는 경향은 2000년대에도 여전하다. 우리들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드라마, 어떻게 보아야 할까?

 

▲ MBC에서 방영됐던 '113 수사본부'1973년 10월 13일~1983년 7월 1일 방송종료오지명, 송재호, 백일섭 등 출연

 

 

윤석진
국내 1호 드라마칼럼니스트, 충남대 국문과 교수
드라마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동아일보』인터넷웹진 O2에 ‘드라마캐릭터열전’과 『월간 에세이』에 ‘Talk Talk 튀는 드라마’를 연재하면서 트위터(@kdramahub)를 통해 새로운 형식의 드라마비평을 시도하고 있음.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공방전』과 『TV드라마, 인생을 이야기하다』 등의 드라마평론집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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