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9일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문화재청장에 부임했다. 본교 박물관장부터 국립중앙박물관장을 거쳐 문화재청장까지. ‘엘리트코스’라고 말하자 그는 “제가 관운이 좋다고 하더군요”라며 웃어 넘겼다.
최광식 청장은 하회탈을 닮은 인상이다. 눈썹이 진하고 이목구비도 뚜렷해 활짝 웃을 때면 영락없이 닮았다. 인터뷰 요청을 하기 위해 연락을 하니 ‘궁’으로 오라고 했다. 마시라고 나온 차도 전통차였다. 독립만세의 기상이 살아있는 3월 1일, 경복궁 고궁박물관 별관 문화재청장실에서 최 청장을 만났다.

- 많이 바쁘시죠
“바쁩니다. 오늘도 5대궁(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 홈페이지를 하나의 포털 사이트로 만들어 새로 선보였어요. 외형만 바꾼 게 아니라 스토리를 가미했습니다”

- 72학번이신데 대학생활은 어땠습니까
“전공이 사학과였는데 이것저것 활동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지금말로 하면 융복합적 인간이라고나 할까? 고대신문도 했었고, 독서토론회 ‘호박회’, 연극 동아리, 거기다 학군단도 했으니까요. 워낙 바빠서 데이트 할 시간도 없었어요. 어찌 보면 일만 한 건데 제가 좋아서 한 거니까 일이라고만 볼 순 없죠”

- 폭넓은 활동 덕분에 인간관계도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지금은 고대신문 동인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창간기념식, 체육대회, 신년하례회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선후배님들을 만나고 있죠. 호박회도 계절마다 한 번씩 독서토론을 꾸준히 해오고 있어요. 며칠 전에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토론했고요. 아무래도 세월이 흐르다보니 환갑전후인 분들이 대부분이죠”

- 당시 고대신문은 어땠습니까
“고대신문이 특종을 많이 냈어요. 일간지들이 오히려 못 보도하는 걸 우리가 보도하고 그랬거든요. 일간지에서 ‘고대신문에 따르면 이렇다’라는 문장을 보면 참 뿌듯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에는 고대신문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프라이드도 강했어요. 몇 개 안 되는 단과대에서 한두 명밖에 못할 정도로 고대신문 들어가기가 굉장히 힘들었고요. 특히 축제 때마다 했던 ‘역사상 가상인물재판’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군사정권 하에서 쉬쉬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역사 속 인물을 데려다가 가상으로 재판하는 식으로 풍자하는 건데 대강당이 꽉 찼었죠. 그리고 저는 사학과라서 전국에 있는 유적이나 유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땐 고대신문 기자증 하나 들고 전국을 누비고 다녔어요. 요즘으로 치면 문화유산 답사기처럼 유적들 보고 돌아와서 기사 쓰고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렇게 돌아다닌 게 도움이 많이 됐죠”

- 본교 박물관을 설계한 장본인이신데요
“고려대 박물관장은 2002년에 김정배 당시 총장이 제가 전공이 한국고대사고, 박물관이나 문화유적을 많이 다니는 걸 알고 맡기셨어요. 그때부터 2005년에 100주년 기념으로 문을 열어야 하는 박물관 건축 준비를 시작했죠. 기본설계부터 직접 도맡아 했습니다. 미국, 유럽, 일본에 있는 박물관을 전부 다녔어요. 그 전에는 전시를 주로 보러 다녔지만 그 때는 수장고, 보안시스템, 방화시설을 주로 알아봤죠. 국내 박물관 대부분이 건물을 지어놓고 어떻게 전시를 할 건지를 고민하는데 저는 처음부터 어떤 유물을 어떻게 전시하겠다라는 기본 컨셉을 가지고 박물관을 지었어요”

- 그 덕분에 2007년 박물관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으셨죠
“당시 국내에 처음으로 북한유물을 들여왔고, 고구려 유물도 가져왔어요. 그리고 최초로 박물관에 CEO과정을 개설했고요. 대학 최대 규모 박물관이고, 100주년 맞아서 학교를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 이명박 대통령 내외도 그 CEO과정을 수료했더군요
“당시에는 대통령 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이 김윤옥 여사와 함께 등록을 했어요. 물론 이 대통령은 바쁘시다보니 자주 못 오셨는데 사모님은 자주 오셨어요.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죠. 예전엔 박물관이 구태의연했는데 그때 대중화, 정보화, 국제화된 고려대 박물관을 보시면서 놀라시더라고요”

- 이후 2008년에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부임하셨는데 고고학·미술사 비전공자가 아닌 역사학자로서는 최초였습니다
“박물관에 있는 게 유물이라서 그동안 고고학이나 미술사 전공자가 많았죠. 역사학자로서 그 유물들을 하나하나 엮어서 큰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유물을 왜 만들었나, 혹은 그 양식보다 유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더 중요하거든요. 여태까지 전시에서는 고조선도 없었고, 조선도 없었습니다. 그저 유물, 양식 뿐 이었죠. 나라도 물론 있었지만 띄엄띄엄 있다 보니 연결이 안 됐어요. 시대흐름을 따라서 통사전시로 바꿨습니다. 박물관 1층을 1시간만 보면 한국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엮어내는 건 아무래도 역사학자가 더 낫거든요”

-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하실 때도 CEO프로그램을 개설했던데 CEO들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나라 CEO들이 자기 분야는 누구보다 잘 아는데 우리 역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 분들에게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CEO들도 역사문화에 대한 갈구가 있었어요. 외국 CEO들을 만나면 문화·예술 쪽으로는 할 얘기가 없다는 거에요.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그래서 항상 술로 그 벽을 넘어서려고 하는 거죠. 다른 나라 문화를 모르면 우리나라 육자배기 판소리나 단원 김홍도에 대해선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요즘엔 CEO들도 주말에 골프 치러 안 가고 문화유산도 보러 다니고 박물관, 미술관, 공연장 다니면서 배우고 있어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박물관에 후원도 해요. 서로 도움을 주는 거죠”

- 지난해 G20때 오바마 대통령이 국립중앙박물관을 보고 극찬을 했다던데요
“지난해 G20환영만찬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했습니다. 세계 정상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가 직접 제안한 거고 대통령도 좋다고 하셨죠. 만찬이 끝나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한국문화가 이렇게 독특한 줄 몰랐고, 박물관도 훌륭하다고 답했어요. 다른 인사들도 한국이 신흥부국정도인 줄 알았는데 오랜 역사가 있는 나라라는 걸 그때 느꼈다고 합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맡을 때와 문화재청장직을 맡을 때의 차이점은요
“일의 양이 상당히 늘었습니다. 예산이나 인력도 훨씬 많고요. 박물관장 할 때는 유물만 다루면 됐는데 지금은 전국 각지에 있는 유적, 유형·무형 문화재, 자연문화유산을 다뤄야 합니다. 박물관을 점이라고 하면 문화재청장은 선과 면이라고 할 수 있죠. 전국의 유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 최근에는 어떤 사안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일제시대 때 피해를 입은 궁을 제대로 복원하려고 합니다. 건물복원도 중요하지만 그 건물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스토리도 함께 복원하려고 해요. 숭례문 복원도 기계로 하지 않고 전통기술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 내년 말이면 복원공사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광화문 현판문제는 일단 현판 제작위원회를 만들어서 논의 중입니다. 다만 광화문 글씨를 한자로 할지 한글로 할지 정해지지 않았어요. 나중에 공청회를 열어 정하는 것도 생각 중입니다”

- 교수로서 학교에 돌아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지금도 교수에요. 휴직중일 뿐이지. 이제 3년 정도 됐나?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면 지금은 사회 교육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자존심에 상처가 됐던 숭례문이 복원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갈까 생각 중입니다. 지금도 학생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요”

-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故김상협 총장이 ‘지성과 야성의 광장에서 뛰어 놀아라’라고 그랬어요. 저는 거기에 감성을 더하고 싶습니다. 술이 아닌 예술을 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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