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의 서막을 연 J. F. 케네디, 영국을 넘어 미국 침공에 성공한 비틀스, 모든 가정에 자리 잡은 텔레비전, 반전시위와 뉴 레프트 운동을 불러온 베트남 전쟁, 그리고 인류의 달 정복… 1960년대는 진보와 보수, 희망과 혼돈이 양분된 ‘살아 있는’ 시대이자 소비사회의 풍요로움이 본격화된 시대였다. 이 시기, 1950년대 리처드 해밀턴에 의해 형성된 ‘팝아트’는 당시 미국을 휩쓸던 추상표현주의의 무거운 그늘을 밀어내고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앤디 워홀이라는 미술의 아이콘은 바로 그 상징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간, 다른 공간의 한국 미술계는 그렇지 못했다. 1960년대의 한국미술은 이 땅의 모든 것들이 그러했듯이 6.25라는 외상(外傷)을 극복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서양미술의 무비판적 수용을 극복해야 하는 책무도 주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가 주도한 추상미술운동, 즉 ‘앵포르멜 운동’은 1940~50년대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일본을 거치지 않고 국내에 이식하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이라는 존재가 느껴야 했던 극심한 고통과 갈등을 캔버스에 담았던 서구의 앵포르멜이 10여 년 뒤 6.25라는 민족의 비극을 추슬러야 했던 국내 미술계에 그대로 옮겨졌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양쪽 모두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의 참혹함을 견디지 못한 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추상미술의 전성시대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주의적 구상 작품들이 힘을 쓰던 <국전>에 반발해 한국적인 추상미술을 꾀하고자 했던 김환기와 일본의 ‘모노파’ 운동을 주도했던 이우환이라는 걸출한 화가를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를 바라보는 후대의 평가는 그리 안온하지만은 않다. 1960년대 들어 서구의 미술계가 물질문명의 풍요로움과 그것이 파생시킨 여러 현상을 팝아트라는 이름으로 시각적인 언어로 재빠르게 탈바꿈시킨 데 비해 우리 미술계는 앵포르멜과 모노크롬이라는 두 가지 화두 ‘이후’의 화두를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 식민지 잔재라는 근대성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것은 물론 1960~70년대 파란만장했던 현대사를 외면했다는 업보까지 떠안아야 했다. 실제로 당시 한국미술은 4.19의 정신을 시각적으로 승화시키기보다 5.16 군부 쿠데타 세력이 주도했던 ‘근대화’의 논리를 대변하는 모더니즘 미술을 만들어가는 데 주력했다. 그중에서도 조각가 김세중의 <충무공 이순신장군상>(1968)은 ‘조국 근대화’에 앞장선 한국미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일깨워주는 불명예스러운 아이콘이다. 김세중이라는 뛰어난 조각가, 청동으로 빚어진 뛰어난 조형미에도 불구하고 <충무공 이순신장군상>은 당시 군사정권의 ‘국민 길들이기’ 수단에 미술이 가축처럼 길들여졌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같은 공간적 배경 아래 이명박의 ‘청계천’, 오세훈의 ‘광화문 광장’으로 확대재생산 되면서 <충무공 이순신장군상>이 왜 부끄러운 상징으로 남게 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김세중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청동으로 이순신 장군을 빚기 8년 전, ‘고등학생’ 손장섭이 거센 파도와 같은 스크럼을 이룬 젊은 학생들을 배경으로 부상자를 부축하고 있는 젊은 청년의 분노에 가득 찬 눈빛을 대담한 구성과 거침없는 색채로 구성한 <사월의 함성>을 남겼다는 점, 같은 해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서구의 ‘68 혁명’이 발발했다는 점은 당시 우리 예술가들의 현실 인식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윤동희 미술칼럼니스트

《월간미술》 기자, 안그라픽스 편집장을 거쳐 도서출판 북노마드 대표,
광주비엔날레 학술지 《눈(noon)》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 대학원, 경기대 대학원, 성신여대, 세종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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