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한국 화단을 주름 잡은 추상미술은 어쩔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구상미술조차 난해하게 다가오는 대중에게 추상미술은 미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더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데 주력한 듯했다. 추상미술이 성행할수록 대중은 미술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지구 위 다른 지역에서 모더니즘에서 탈피해 포스트모더니티와 해체를 탐구할 때, 우리의 추상미술은 현실을 향한 치열한 내레이션 대신 자기 독백을 정당화했다. 서구의 미술계가 미술 작품의 의미를 작품 내부적 요인에서 찾지 않고 그것이 존재하는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 탐색하며 젠더와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정신분석, 철학과 미술의 교감을 꾀하는 동안 한국미술이 천착한 앵포르멜과 모노크롬 운동의 체력은 갈수록 부실해져만 갔다.

바로 그때 1980년 일어난 광주민주화항쟁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추상미술, 특히 단색회화파의 힘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대중과 현실을 뒤로한 채 미술의 귀족주의를 염원하던 한국 미술계에 광주민주화항쟁은 현실은 뼈저리게 인식할 것을 주문하는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때마침(?) 박정희 정권에 못지않은 정치적·문화적 탄압을 일삼던 새로운 군부독재 정권의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허황된 구호는 한국미술로 하여금 ‘민중미술’이라는 ‘입장’을 모색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미술사가들은 민중미술의 시작을 1979년 창립된 ‘현실과 발언’ 그룹에서 찾는다. 이전의 미술가 집단이 대부분 작가들로 이루어진 반면, ‘현실과 발언’은 모더니즘 미술이라는 제도권에 반기를 들고 ‘민중’을 키워드로 한 미술의 새로운 소통 구조를 염원한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함께 동거하는 형태라는 점이 눈길을 모았다. 미술을 소수가 즐기고 느끼는 것이 아닌 사회 속으로, 대중 속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자들이었다. 주재환, 오윤, 손장섭, 임옥상, 민정기, 김용태, 김정헌 등이 ‘미술의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참여했다. 이들이 꿈꾼 새로운 미술 세상은 창립선언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기존 미술이 유한층의 속물적 취향에 아첨하는 도구에 불과하고, 대중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관념을 고집하고,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 게으르다는 그들의 선언은 적확한 것이었다. 이후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두렁’ 같은 소집단이 출현하고,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를 기점으로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민족미술협의회’가 지금도 유의미하게 회자되는 까닭은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현실을 애써 외면하던 한국 미술계가 군부독재를 향한 투쟁은 물론 통일, 반전, 환경, 여성, 노동 등 지금까지도 우리가 진정 해결하지 못하는 참된 가치를 미술의 언어로 가져오고자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홍성담, 신학철 등 군부독재 정권의 정치적 탄압을 마다하지 않았던 작가들의 이름도 1980년대 ‘민중미술’ 시대를 소급할 때 잊히지 않는 아이콘이다.

윤동희 미술칼럼니스트

《월간미술》 기자, 안그라픽스 편집장을 거쳐 도서출판 북노마드 대표,
광주비엔날레 학술지 《눈(noon)》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 대학원, 경기대 대학원, 성신여대, 세종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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