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입실렌티 때 녹지운동장엔 수많은 붉은 티셔츠가 장관을 이룬다. 얼핏 보면 다 똑같은 크림슨 색 티셔츠로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개성을 뽐낸다. 어떤 학문을 전공하는 과인지 알 수 있도록 나름대로 약속된 이미지가 입혀 있기 때문이다.

 

뻔한 이미지, 뻔하지 않은 과티

올해 제작한 과·반 티셔츠(과티)를 살펴보면, 각 학과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티셔츠에 그려 넣어 과의 특성을 살렸다. 인문대 중국학부는 검은색 중국지도 위에 호랑이를 넣어 중국어학이란 뜻의 'Sinology'라는 문구를 입혔다.

공과대 신소재 화학부는 ‘정열반’이라는 과의 느낌이 담기도록 티셔츠 뒷면에 ‘불꽃 속의 호랑이’를 그려 넣었고, 인문대 독일문화정보학과는 과 기조인 ‘Playboy’의 의미를 살려 토끼그림에 독일국기의 색깔 패턴을 입혔다. 김준엽 독일문화정보학과 회장은 “토끼 무늬는 토끼해에 들어온 새내기들이 잘 공부하면서도 잘 놀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수요 공급 그래프, 유전자 지도 등이 그려진 과티도 있다.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하기도 한다. 조형학부는 호랑이 줄무늬로 ‘ART&Design’이라는 글씨를 만들어 이미지와 글자가 합쳐지는 효과를 줬다. 정통대 학생회는 정통대만의 특징을 고민하다 티셔츠 뒷면에 QR코드를 넣었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으면 단과대 커뮤니티로 접속하게 된다. 구동현 정통대 회장은 “현재 화두가 되고 있는 IT산업인 QR코드와 정통대에서 배우는 학문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교색인 크림슨 색이 아니라 군청색이나 분홍색, 노란색과 같은 색을 사용하는 학과도 있다. 공과대 산업경영학과는 2007년부터 일명 ‘핫핑크’ 반티를 고집해왔다. 단과대 내에서 숫자가 적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쉽게 같은 과 동기, 선후배를 찾기 위해서다. 이민영(공과대 산업경영10) 씨는 “처음에는 반대도 많았지만 인파 속에서도 과 사람들을 금방 찾을 수 있어 행사가 끝나면 다들 좋은 선택이었다고 이야기 한다”고 말했다. 인문대 고고미술사학과는 깔끔한 흰색 칼라티셔츠에 크림슨 색 줄무늬 패턴을 넣었다.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살려 제작단계에서도 학생들 반응이 좋았다. 임수영 고고미술사학과 회장은 “크림슨 색은 이미 다른 과가 많이 했기 때문에 굳이 다른 과와 통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말했다.

 

과 티셔츠,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본교의 과 티셔츠 역사는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과티 문화가 아예 없었다. 이윤희(철학과 64학번) 씨는 “내가 학교를 다녔을 때는 티셔츠가 아니라 진한 청색 교복을 입고 고연전에 갔다”며 “옷차림 보다는 응원으로 과 학생들이 뭉쳤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고연전 때 붉은 색 티셔츠를 입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중반이다. 당시 응원단은 학생들에게 붉은색 상의를 입으라고 요구했다. 이의정(신문방송학과 75학번) 씨는 “그때부터 대부분의 학생들이 붉은 티셔츠를 입었다”며 “타 학교 여학생을 고연전에 초청할 때 붉은 색 옷을 입고 오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고 설명했다.

학과 끼리 티셔츠를 맞춰 입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다. 학과에서 자체적으로 티셔츠의 디자인과 색을 정했다. 색도 계열도 다 다를 정도로 다양한 티셔츠들로 인해 고연전의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1984년 본교에 입학한 안암 기록자료실 김상덕 과장은 “과 티셔츠로 색을 맞추는 것 대신 붉은색 썬 캡으로 색을 맞췄다”고 말했다. 1989년에 본교를 입학한 구교준 교수(정경대 행정학과)는 “학교의 문구가 들어간 ‘스웨터’를 맞춘 학과도 있었다”고 말했다.

 

고잠을 입고, 고려대를 입는다

이른 봄 꽃샘추위, 겨울에 두 세겹 껴입기 좋은 고대잠바는 고대생들의 필수 아이템이다. 학교에 막 입학한 새내기들은 하루빨리 고잠을 입고 학교를 돌아다니길 기다린다. 3월 말부터 고잠 제작에 참여한 이국호(공과대 산업경영11) 씨는 “고잠을 입고다니는 선배를 보고 부러움과 동경심을 느꼈다”며 “곧 입을 고잠이 무척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고대잠바는 1990년대 초부터 있었지만 지금처럼 많은 학생들이 입고 다니진 않았다. 학교 내 문구점에서 학교잠바를 판매 했지만 스스로 디자인을 해 입는 문화는 없었다. 1992년에 본교에 입학한 강철구(본교 강사‧사회학과) 씨는 “운동부 학생들이 주로 맞춰 입었을 뿐 학교잠바를 입고 다니는 학생은 일반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과별로 고대잠바를 맞춰 입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2000년 까지만 해도 학교 커뮤니티를 통해 공동구매를 했지만, 크림슨 색이 아닌 빨간색이었고 참여인원도 적었다. 박종찬(생명대 식자경00) 씨는 “야구 붐이 불었던 2005년 정도가 돼서야 각 과반에서 고잠을 맞춰 입는 문화가 활성화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정태환(인문대 사회학과) 교수는 “맨 처음 고잠을 단체로 입기 시작한 사람들이 호감을 얻고, 그 호감이 개인적 만족을 더했을 것”이라며 “결국 사회화과정(Socialization)에 성공한 고잠이 고려대 내에서 하나의 문화로 인정받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자랑이 아닌 자부심으로
학교잠바처럼 상징적 가치를 가진 옷은 집단의 존재감을 높여 개인에게 자존감을 준다. 집단으로부터 자존감을 얻은 개인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게 느껴 집단을 자랑스러워한다. 애교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학교로고가 보이는 점퍼를 입을 확률이 많아지는 원리이다. 김성민(문과대 한국사10) 씨는 “고대잠바를 입으며 고대생이라는 자부심을 느낀다”며 “현재 자신이 속한 위치를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허태균(문과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국 한 명문대의 학생들이 경쟁 대학과의 미식축구경기에 이겼을 때, 학교로고가 보이도록 옷을 입는 학생이 더 많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며 “고잠을 다른 사람의 부러움이 목적이라면 유치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결과에 대한 자부심과 애교심에서 입는다면 일종의 혜택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단체복을 입은 개인은 ‘조직의 일원’이라는 자신감에 일탈행위를 하는 경향이 강해지기도 한다. 평소에는 소심했던 사람이 고연전 때 지하철 무임승차를 하고 객차 안에서 응원을 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처럼 당당하다 못해 ‘뻔뻔’해질 수 있는 이유는 탈개인화(Deindividuation)의 영향이다. 허 교수는 “평소라면 절대하지 않을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전교생이 함께 빨간 옷을 입고 술잔을 따르며 ‘고대’를 함께 외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적당하면 즐겁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그것은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고대인은 고잠이나 반티를 입고 고려대의 일원이 된다. 하지만 일원인 동시에 고려대를 대표하는 얼굴이 된다는 점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 사진 및 도안(조형학부, 이과대 이학4반, 문예창작과, 정보통신대학, 언어학과, 영어학과, 독일정보문화학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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