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몸담고 있는 곳은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하는 기업의 연구소이다. 대한민국의 수출 효자 품목일 뿐만 아니라 세계 1위를 하는 몇 안 되는 품목이기에 경쟁사로부터 기술 및 인력유출 시도가 빈번하게 이뤄진다. 이에 대항하여 회사는 많은 비용을 들여 연구소와 같은 중요한 건물의 경비요원을 확충하거나, 혹은 해커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한 전산보안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물리적 보안이나 회사의 주요 전산시스템이 뚫리는 것 보다 더 큰 보안사고는 회사가 장기간에 걸쳐 육성한 핵심 연구개발 인력이 경쟁사로 이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측은 해마다 연봉계약서에 서명할 때, 보안서약서에도 서명을 하도록 요청한다. 그 보안서약서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퇴사 후 2년간 동종 업계로의 이직을 금지”하는 것이다.

회사는 임직원 퇴사 후 2년간 급여를 따로 지급하지 않을 뿐더러 종신고용을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몇 년, 많게는 십 수 년 이상 반도체를 업으로 삼아왔던 사람에게 2년이라는 휴식기간은 요즘같이 경력관리를 통한 몸값 상승을 추구하는 시대에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이다. “전직제한이라고 쓰고 노예계약이라고 읽는다”라며 요즘 유행어를 패러디한 동료 연구원의 말에 쓴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15조에는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적혀 있다. 물론 직업선택의 자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연구개발 인력의 유출 방지를 통해 기업 혹은 정부기관 연구소가 어렵게 일궈낸 지적 재산, 더 나아가 국부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 전직 금지의 목적이다. 과학기술 인력의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제한할 정도로 막강한 전직금지 규정은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로서 보호되고 있다.

과학기술인의 경쟁사 혹은 해외로의 전직이 법률로 강력하게 제한받는다. 이에 비해 법을 만들고 판단하는 입법, 사법, 행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은 공직을 그만두고 로펌이나 대기업으로 쉽게 이직한다. 그래서 현직에 있는 선후배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로비를 통해 막대한 부를 손쉽게 벌어들이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를 일컬어 전관예우(前官禮遇)라고 한다. 전관예우에 관한 특권을 없애기 위해서는 고위공직자가 퇴임한 이후 당사자가 종사하던 업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곳으로의 이직을 2년간 제한해야 한다.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 한다고 고위공무원들의 반발이 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과학기술인들은 법적으로 전직금지라는 손해를 이미 감수하고 있지 않은가?

과학기술인의 전직, 고위 공직자의 전관예우 금지의 공통 목적은 사리(私利)를 위해 공익(公益)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인의 사욕을 위한 전직은 한 기업의,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고위공직자의 사욕을 위한 전직은 법과 질서를 문란하게 해 결국 대한민국의 보안을 위협하는 것이 아닐까?

<Crystal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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