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청〉은 홍콩의 독립영화 감독을 자칭하는 프루트 챈(Fruit Chan)의 작품으로서 ‘홍콩 반환’을 소재로 한 3부작의 완결편이다. 이런 의미에서 〈리틀 청〉은 홍콩 영화다. 중국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더구나 홍콩 반환 직전인 1996년 말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영화의 이야기는 중국 본토와는 시 공간적으로 다른 문화권에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리틀 청〉이 3부작의 완결편이라고 해서, 앞의 두 작품들과 연관지으면서 감상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 역시 독립적으로 ‘세상, 변화(또는 불변) 그리고 아이들’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홍콩 반환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변화를 그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일상의 불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다큐’적인 카메라 워크로 담은 영화 장면에서 보는 것들은 무료하기까지 한 불변의 일상생활과 사람들의 습관적 행동과 그런 속에서도 언제나처럼 존재하는 생존경쟁을 위한 삶이다.
 
청은 홍콩의 미로 같은 거리를 곡예 하듯 달리며 팡이 탄 차를 쫓아간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압송차와 비슷한 앰뷸런스 차량 한 대가 엇갈리고, 청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쫓아가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차의 뒷문을 열었을 때 발견한 것은, 그에게 그래도 순결한 의미와 가치로 남아 있던 우정의 짝 팡이 아니었다. 무료한 현실의 독소로 썩을 대로 썩은 병상의 건달 데이빗이었다. 현실은 다시 한번 변화의 기회를 배반한 것이다.


주인공 리틀 청의 할머니는 허구한 날 TV 시청을 하는데, 그것도 전통 경극(京劇)의 전설적 배우 ‘브라더 청’의 지난 필름들이다. 할머니의 이런 집착은 손자의 이름도 ‘청’으로 짓는 데까지 이른다. 영화의 도입부는 매우 상징적이다. 어둠침침한 응접실 한 쪽 장롱 위에 TV가 켜 있고 화면 안에서 브라더 청이 목청 돋아 노래부른다. 할머니는 막상 TV는 보지 않고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고 있다. 보행기에 앉은 한 살 짜리 아이 혼자서 고개를 잔뜩 젖히고 TV화면을 넋 놓고 보고 있다. 이와 함께 독백이 흐른다. “내가 처음 브라더 청의 노래를 들은 게 한 살 때, 죽으나 사나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만 켜놓으시는 할머니 때문에 TV에 나오는 연예인은 오로지 브라더 청 밖에 없는 줄 알았다.”

청의 아버지는 식당 운영의 반복적 삶에 익숙한지 이미 오래고, 청의 어머니에게도 생활의 본질적 변화는 없다. 그녀가 즐기는 마작도 이미 일상적인 것이 된지 오래다. 소시민에게서 사업 보호비 명목으로 돈이나 뜯는 건달 데이빗을 비롯해, 이 가족 주위에서 발견되는 사람들의 삶 또한 본질적 변화보다는 현실의 고착화를 위한 변신을 꾀하는 것일 뿐이다. 영화의 종결부, 종교 집회에서 부르는 찬송가 가사는 “아무리 고단하고 지친 인생일지라도 우리에게 삶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쩌면 이 가사 역시 변화보다는 오늘의 현실을 수용하라고 가르치고 있는지 모른다.

변화가 없는 곳에서는 현실이 곧 진실이 되기 쉽다. 지향해야 할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진실’에 맞추어서 아이는 서둘러 어른으로 만들어진다. 영화 도입부에서 이미 리틀 청의 독백은 이 모든 것을 정곡을 찌르듯 요약하고 있다. “난 아홉 살에 세상 이치를 터득했다. 아빠는 돈 벌려고 식당을 하고, 필리핀 가정부도 돈 벌려고 여기 왔고, 엄마도 돈 따려고 열 나게 마작하고, 브라더 청도 결국 돈 벌려고 TV 자선쇼에 출연한다. 나라고 빠질 수 있나. 난 이미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돈이 꿈이요, 환상이요, 미래라는 걸.”

청은 어느 날 자기네 식구가 경영하는 식당에 일자리를 구하러 온 불법체류자 팡을 만난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소녀 팡을 뒤쫓아가 그녀가 식당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청은 독백한다. “저 아이도 여기에 돈 벌러 왔을 것이다. 돈 버는 데 통달한 아이는 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팡이란 아이도 상당히 고수였다.” 이 독백 역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지만, 필요한 변화가 거부되는 곳에서 아이는 재빨리 어른이 돼 간다. 성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요지부동의 현실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서 변신해간다는 말이다. ‘애늙은이 만드는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관객은 “쟤, 9살 맞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은 ‘에버랜드의 피터 팬’이다. 제임스 배리 원작의 피터 팬이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Neverland)’에 산다면, 프루트 챈의 청은 너무도 확실히 존재하는 현실의 나라 ‘에버랜드(Everland)’에 발붙이고 산다. 다만 둘 사이의 공통점은 각기 처한 상황은 달라도 아이의 속성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소름끼칠 정도로 지독한 장난꾸러기이고, 철저하게 자기 실속을 챙기며, 어른을 증오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쫓은 형의 소식을 추적하다가 아버지에게 들킨 청은, 아랫도리를 벗긴 채 식당 앞 길가에서 벌을 선다. 이 때 9살 소년은 마치 90세 노회한 어른의 ‘시조’를 목청 돋아 읊듯 절규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치욕적인 벌을 세운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넘어서, 자신에게 어른의 삶을 강요하는 변화 없는 삶에 대한 절규다.

〈리틀 청〉은 아이가 주인공인 다른 영화들과 달리, 아이의 눈으로 현실을 조명하는 게 아니다. 인간 삶을 둘러싼 현실로 아이를 조명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현실 아래에서 형성돼 가는 인간성을 비추어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뭔가 변화할 수 있는 기회는 찾아온다. 그렇게 완고하던 아버지도 경찰에 압송돼 가는 팡을 쫓아가려는 아들 청에게 “자전거 타고 가!” 하며 어른 자전거를 내준다(이 장면은 빠르게 지나가 버려 관객들이 놓치기 쉽다).

청은 홍콩의 미로 같은 거리를 곡예 하듯 달리며 팡이 탄 차를 쫓아간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압송차와 비슷한 앰뷸런스 차량 한 대가 엇갈리고, 청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쫓아가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차의 뒷문을 열었을 때 발견한 것은, 그에게 그래도 순결한 의미와 가치로 남아 있던 우정의 짝 팡이 아니었다. 무료한 현실의 독소로 썩을 대로 썩은 병상의 건달 데이빗이었다. 현실은 다시 한번 변화의 기회를 배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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