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 입원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서둘러 병실을 찾았더니, 이미 말씀이 자유롭지 못하신 선생님께서는 미소 띤 얼굴로 내 손을 꽉 감싸 주시었다. 내가 대학 2학년 때 선생님을 처음 뵙고,‘중국 역사’를 공부하는 길로 들어선 지 어언 48년!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란 예감으로 찾아오는 분들 틈을 탄 짧은 면회시간이었지만, 나와 선생님과의 압축된 기억의 파일이 풀리며 찰나에 온갖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묵언(黙言)의 대화를 잠시 나누고 병실을 나서며 빠른 시일 안에 한 번 더 찾아뵈어야지 하다가, 닷새만에 부보(訃報)를 듣게 되었다. 빈소(殯所)에는 선생님을 추모하는 각계 인사들의 조문(弔問)이 줄을 이었고, 제자 후학(弟子 後學)들의 절절한 ‘추도사(追悼辭)’도 여러 일간신문에 고루 실렸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경력 위주의 여러 ‘추도사’의 내용과 중복을 피하기 위해, 나는 오랜 세월 내가 곁에서 보아온 선생님의 풍모를 한번 회고함으로써 추모의 글로 삼을까 한다.

광복군 동지 장준하(張俊河) 선생이 <사상계(思想界)>의 주간(主幹)을 겸직하고 있던 선생님이 1961년에 시리즈로 펴내기 시작한 ‘사상문고(思想文庫)’1권 <중국공산당사>를 읽으며, 우리 세대는 현대 중국에 대한 첫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현대 중국을 있게 만든 전통시대 중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의 바다로 차츰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광활한 중국 대륙을 두 발로 누빈 경력의 소유자이신지라, 선생님은 강의에서도 현지답사와 중국어의 중요성을 늘 일깨워 주셨고, 후일 냉전(冷戰)이 끝나고 나면 우리들과 중국 대륙을 답사하는 것이 장래의 꿈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 내가 고려대 교수가 되고 선생님께서 은퇴하신 이후 1991년과 1992년 두 차례에 걸쳐, 나는 드디어 고려대 사학과 학생들을 이끌고 북경대학을 방문하여 특강을 듣게 하고 중국 대륙 답사를 실현할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30년 전에 피력하신 꿈을 들었던 내가 고려대 교수가 되어 한중수교(韓中修交)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실현한 것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두 차례의 중국 답사를 마치고 북경대학 역사과 교수의 특강 20편을 엮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 원고를 고려대학교 출판부에 넘기고 서문(序文)을 쓰고 있는데 한중수교(韓中修交)의 뉴스가 들려 왔다. 이 책이 출간되자 누구보다도 선생님이 가장 기뻐해 주셨음은 물론이다.

근 반세기에 걸쳐 때로는 곁에서 때로는 먼발치에서 지켜보아 온 선생님풍모를 나는 용(勇)·지(智)·근(勤)·신(信)·명(明)·민(敏)·화(和)·락(樂)의 여덟 글자의 한자(漢字)로 표현하고 싶다. 먼저 ‘용(勇)’이 없었다면 어떻게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유격대에서 활약하고 마침내 ‘광복군’에 합류할 수가 있었겠는가. 다음의 ‘지(智)’는 전문지식이 아닌 ‘지혜’를 이름이니, 광복 후 김구 주석(金九 主席)의 임시정부가 귀환하게 되었을 때 함께 귀국하지 않음으로써 성품에 맞지 않는 정치의 길에 들어서지 않고, 홀로 상해(上海)에 남아 학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내린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 ‘근(勤)’은 ‘부지런함’으로 선생님이 이룬 많은 저작(著作)은 약주 드신 다음날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집필하시는 습관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신(信)’은 ‘믿음’과 ‘신뢰’이니 선생님은 ‘신의(信義)’를 중히 여기고 한번 신임한 사람에게는 끝까지 믿음을 거두지 않았으므로, 사회과학원의 성진희 실장은 무려 40년간 선생님을 곁에서 모실수가 있지 않았을까. 다음 네 글자 중에 첫째는 ‘명(明)’으로 선생님은 사리(事理)의 분별이 분명하였으며, 명분이 약하고 실권도 없는 자리는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잘 알고 끝내 물리쳤다. ‘화합’을 의미하는 ‘화(和)’는 즉 ‘하모니’이니, 공동체에서는 ‘화합(和合)’이 중요함을 선생님은 늘 강조해 오셨다.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 형의 선생님은 ‘화이부동(和而不同)’한 현대적인 ‘군자(君子)’라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 글자인 ‘락(樂)’은 ‘즐거움’ ‘풍류’ 등을 의미하는데, 선생님은 생활 속에서 주로 술로 ‘풍류(風流)’를 즐기셨다. ‘낙천적(樂天的)’ 성품을 지닌 선생님이 지인(知人)들과 환담하는 도중 조금이라도 우스운 얘기라도 나올라치면 배를 잡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하시는 풍모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우리는 선생님의 강건한 신체를 “하늘이 내린 체질”로 여기며, 요즘 같이 장수(長壽)하는 사람이 늘어가는 추세로 보아 ‘백수(白壽)’는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20대 때 신장결석을 수술로 제거하느라 한 쪽 신장만 남아있는 상태에서도 음주를 곧잘 즐기셨다. 주석(酒席)에서의 매너는 그야말로 최상급으로서, 종업원에게 반말로 호통치거나 만취하여 비틀거리며 걷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선생님은 낚시 등산과 같은 취미도 없고 장기, 바둑도 둘 줄을 모르셨다. 골프도 배운 일이 없을 뿐더러, 신체단련을 게을리 하시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황해를 사이에 두고 선생님과 서로 존경해오던 사이인 당시 95세 북경대학(北京大學)의 석학 계선림(碩學 季羨林) 교수가 처음 방한(訪韓)하여 초청자인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주최의 만찬회에 참석했을 때, 두 분 선생님이 모두 평소에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드러나자, 좌중에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병원 가기를 극도로 싫어하셨던 선생님은 오래 피던 담배를 너무도 늦게 끊으셨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한 달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성북동의 사회과학원에 가더라도 이젠 선생님을 뵐 수 없다는 사실이 차츰 실감(實感)으로 느껴지기 시작하고 있다. 나의 뇌리에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는 선생님의 풍모가 더욱 그리워지면, 선생님의 탄일(誕日)인 8월 26일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 선생님 묘소를 한번 돌아보고, 그동안 정신없이 살아 온 나 자신의 생활도 다시 성찰(省察)해보는 시간을 가지리라!
(2011년 7월 22일)  

박원호(본교 명예교수·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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