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라면 학교를 오가는 길에 ‘고산자로’라고 적힌 파란 표지판을 보았을 것이다. 고산자로는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김정호의 호 고산자(古山子)에서 온 도로명이다.

고산자로를 지나 학교로 오면 박물관에서도 고산자 김정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보물 제853호 수선전도 목판(首善全圖 木板)이다. 이 목판은 옛날 서울 지도로, 김정호 지도와의 유사성과 생존 시기로 보아 그가 1840년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선’은 우두머리란 뜻으로 서울을 가리키며, 목판에는 한양의 시가지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정호를 말하면 대동여지도와 비극으로 끝난 그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다.

“팔도를 돌아다닌 것이 세 번, 백두산에 오른 것이 여덟 차례다. 지도를 새겨 대원군에게 바쳤으나 대원군이 크게 노해 목판을 압수하고 김정호를 잡아 옥에 가뒀다. 그는 결국 옥사했다.”

열정적인 지도제작자였던 김정호는 뛰어난 성과를 전혀 인정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었다. 그러나 이는 왜곡된 이야기로, 그 시작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정호가 백두산을 일곱 번 등반하고 옥사했다는 이야기는 1925년 최남선이 조선 위정자들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동아일보에 실었던 글에 처음 등장한다. 대원군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일제와 대비시키려 했던 <조선어독본>에는 백두산 등반이 여덟 차례로 늘어났고 김정호를 옥사 시킨 인물이 대원군이라고 기록돼 있다. 결과적으로는 두 글 모두 김정호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다.

실제 김정호의 출신지나 출생, 죽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기록물을 통해 중인 이하의 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대동여지도> 이외에도 여러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었는데, 그 지도들이 관찬자료를 참고로 해 국가주도 지도제작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어 그의 옥사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결국 진짜 김정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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