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주년기념관 1층 백년사전시실 안쪽에는 <제헌헌법 초안>이란 이름의 빛바랜 원고가 한 묶음 전시되어 있다. 원고지에 빼곡히 적힌 것은 낡아빠진 지질(紙質) 만큼이나 건조한 법조문들이다. 한자가 외국어 취급을 받는 요즘 시대에 조사(助詞) 빼곤 모두 한자로 적혀 있다 보니, 관람객들은 표지도 없는 이 평범한 원고지에 눈길을 주기 보단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응원단장복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고 만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그 원고뭉치는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로 지정된 국가적 자산이다. 문화유산까지도 순위를 매겨야겠냐는 힐책은 잠시 잊어두시라. 국보 1호 숭례문이 그러했듯 제1호가 갖는 상징성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 아니던가. 평범한 원고뭉치가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의 영예를 차지하게 된 것은 영구히 보전해야 마땅한 제헌헌법의 원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헌헌법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독립국이 국가의 운영원칙을 천명한 최초의 문서였지만 6.25 전쟁의 포화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을 확인할 수 있는 유형의 자산은 유진오가 기초한 제헌헌법 초안 밖에 없는 셈이다.

헌법 공포를 한달 여 앞둔 1948년 여름, 유진오는 200여명의 국회의원이 운집한 제헌국회 연단에서 자신이 기초한 헌법안의 근본 이념이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의 조화에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일부 국민이 굶주리고 기본적 생활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경제상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사회정의 원칙에 입각한 대한민국의 경제운영 원칙이라고 보았다. 실제 제헌헌법에는 중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농민에 대한 토지의 분배, 그리고 노동자의 이익균점권과 같은 뜨거운 감자가 여럿 담겨 있다. 대통령마저도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실토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선 감히 꿈도 꾸지 못할 내용이지만, 해방공간의 혁명적 열기는 이를 가능케 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우위라는 오랜 전통이 흔들리는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를 염려하는 당신이라면 60년 전 헌법의 아버지가 그려놓은 민주주의 청사진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시길. 유진오의 제헌헌법 초안의 일독을 권한다.

본교 박물관 학예사 서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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