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사적지 탐방단이 김좌진 생가를 방문해 묵념을 하고 있다.
지난 8월 22일부터 29일까지 광복회(회장=박유철)가 주관하고 국가 보훈처(처장=박승춘)가 후원한 ‘2011년 독립유공자 후손 항일 독립운동사적지 탐방’에 동행했다. 101년 전 한일병탄조약(韓日倂呑條約)이 맺어진 날 출발해 조약 공포일에 돌아온 셈이다. 올해로 10년째 열리고 있는 이 행사의 탐방지는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목단강에서 대련으로 이어지는 중국 동북지역이었다. 단원 대부분이 대학생이었으며, 참가 인원은 총 45명이었다.

나는 누구의 후손인가
23일 아침 7시 김명환 단장 탐방단을 이끌고 중국으로 출발했다. 중국 목단강에 도착해 1938년 10월 일본군에 저항하다 무기가 없어 투신한 여섯 명의 중국인과 두 명의 조선인을 기리고 있는 ‘팔녀투신비’를 본 다음 해림시 산시진 도남촌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주거지로 향하던 버스는 국도 공사 현장에서 멈췄다. 중국에선 대도시 외엔 공사를 알리는 표시를 잘 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탐방단은 마을길을 따라 1km를 걸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一)자로 패인 콘크리트 바닥이다. 김명환 단장은 “여기 사정이 그래도 나은 편”이라며 “이 길 포장한 게 4~5년 밖에 안 되고 다른 곳은 길이 험하다”고 귀띔했다. 독립군의 활동 무대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저항할 수 있는 오지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김좌진 장군이 2년 6개월 살다 박상실에게 암살당한 생가가 나타났다. 탐방단은 김 장군의 흉상 앞에서 묵념했다. 류기민(서울대 1학년) 씨는 “지금까지 국민의례나 호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인 게 사실”이라며 “지금은 이 묵념이 의미 그대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유공자의 후손들에게 선조고(先祖考) 이름을 듣지 못하다가 마침내 그 이튿날 봉오동 승전지에서 할아버지 이름을 아는 후손을 만났다. “증조할아버지의 경우 독립운동 하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셨다”고 운을 뗀 뒤 할아버지를 소개하는 장명찬(경기대 3학년) 씨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의 할아버지 장호강 씨는 중국군이었다가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산둥지구 특파단장을 했다. 광복 후에는 중국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안전히 귀국시키는 일을 했다. 해방 후 육사 8기로 졸업하고 11사단장을 역임했다. 2009년 10월 18일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반면에 자신이 누구의 후손인지도 잘 모르고 그냥 온 경우도 더러 있었다. 김명환 단장은 버스에서 “나라에서 독립유공자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고 후손임을 내세워 좋을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 이해 못할 바 아니다”라고 운을 뗀 뒤, “그래도 이 나라 독립을 위해 애쓴 분들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유환(대전대 4학년) 씨의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위한 특수훈련을 했던 미 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출신이다. 그러나 외가라는 이유로 90년대 중반까지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부가 생기면서 혜택을 받기 시작해 지금은 등록금 걱정이 없다. 김준엽 전 총장도 정 씨의 외할아버지와 같은 미 전략사무국에서 특별훈련을 받고 국내 지하공작원으로 진입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아쉽게도 정 씨는 외할아버지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소명으로서의 독립
독립군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소명의식’의 전범이다.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기대나 그 어떤 대가를 바라는 마음 없이 만주에서 질병과 추위, 배고픔과 싸우며 일제에 저항했다.

소명의식은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일제의 선전에 치명타를 입혔다. 우당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 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라고 설득했다. 추가가(鄒家街)에 정착한 이회영은 오늘날 600억 원에 해당하는 가산 40만 원을 땅 사고 학교 짓는 데 썼다. 1911년 6월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세워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이후 합니하(哈泥河)와 고산자에도 학교를 세웠다. 탐방 5일째 되는 날 버스는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옛터로 향했다.

개교 100주년을 맞은 이 학교 옛 터에서 우리가 본 건 끝없는 옥수수 밭과 전봇대 한 대였다. 지나가는 차들은 먼지 날리며 경적을 울렸고 말과 당나귀는 탐방단을 피해 걸었다. 홍선표 지도교수는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팔아 이곳에서 군 기지를 개척하는 데 썼지만 정작 자신은 상해에서 굶어죽었다”며 “이게 독립운동가의 정신”임을 강조했다.

불가능을 도래하게 하라
탐방 마지막 날. 대한제국의 국권이 상실된 뒤 백 한 번 째 8월 29일이 돌아왔다. 탐방단은 여순 감옥에서 각종 고문기구와 사형 집행 후 생사에 관계없이 사형수들을 담은 통을 보았다. 대대손손 기득권을 향유하는 친일파와 달리 그들의 몸은 죽어서도 온전치 못했다. 탐방단은 안중근 의사의 흉상 앞에서 만세삼창을 했다. 만세삼창을 하며 이 역사가 좀 더 와 닿았다는 주혜린(신라대 4학년) 씨는 “끝까지 당당하게 살아가신 안 의사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배워야 겠다”라고 말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1월호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것이 최선일 뿐 대안은 없다’라고 끊임없이 세뇌되었음에도 이들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때로는 불가능이 현실이 됨’을 말이다”

이범종(인문대 사회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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