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대학가인 라틴지역이 관광지여서 그런지 여름철이면 대학 주변에서 많은 한국 학생들을 만난다.

종종 몇몇은 “유학생 이세요”란 물음과 함께 숙소 구하는 도움을 청하기도 하는데 이런 계기로 몇마디 나누었던 이들은 파리 혹은 프랑스에 대한 불평부터 시작한다. “프랑스 선진국 맞아요”란 질문과 함께. 오래 살아서인지 불편함이 없는 필자에게 늘어놓는 사연을 들어보면 대개는 한국의 생활리듬이나 방식과는 다른,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식 규범이나 기준에 어긋나는 프랑스의 모습들에 대한 불만들이 대부분이다.

 미국에 어학연수라도 다녀온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미국과는 너무 다른 프랑스의 사소한 일상의 하나 하나가 불만이다. 불어라도 몇마디 하고 프랑스 문화에 나름대로 애정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턴가 미국식 사고방식이나 규범들이 소위 구미 선진국의 모든 표준인양 한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프랑스란 나라가 패션이나 각종 명품들, 포도주, 여러 매체에서 한번쯤 접한 적 있는 관광 명소의 화려한 이미지로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지. 

 미국식과 다르다고 투덜거리는 학생들에게는 프랑스가 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패권이나 영향력은 인정하면서도 미국식 문화나 삶의 규범에 반대하는지 얘기해준다. 그러면 “꼭 프랑스 사람처럼 얘기하네요”란 반응이 바로 나오는데 이런 반응에는 본인이 알던지 모르던지 미국식 기준이 보편적이라고 믿음이 묻어난다.

사치품이나 외양의 화려함만 접한 채 프랑스 문화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진 학생들에겐 세느강이 아름다운 이유가 강변의 화려한 건물이나 기념물 때문이 아니라고 얘기해주곤 했다. 강의 오른편과 왼편, 거리나 광장들에서 수백년간 자유와 평등, 인권, 각종 사회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면서 흘린 피와 눈물과 땀들을 얘기해주어야 매장에 줄서서 명품 하나 사겠다는 생각을 접고 박물관이라도 몇군데 더 들어가보고 싶다는 대답이 나온다. 

 파리, 그리고 파리의 모습이 결코 전부를 보여주지 못하는 프랑스.

유학생 신분으로 7년을 살면서 배운건 각국의 전통적 문화나 가치체계, 삶의 방식에는 어떠한 우위도 존재하지 않고 각각 고유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

 삶에는 효율성이나 천박한 자본주의 시장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또다른 특별한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 유럽의 열강이 그랬던 것처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제국주의나 식민지 운영에도 불구하고, 이런 잘못된 역사적 흐름조차 당대에 이미 지식인들에게 강한 저항을 받았듯이, 프랑스가 인류사의 보편적 가치들을 위해 투쟁한 근현대 역사에 대한 많은 독서들. 이들 세가지가 현대 프랑스 사회문화사 관련 논문과 종이 한 장에 불과한 박사학위보다 소중하게 남는다. 

 어떤 독자는 필자를 친불인사라고 비판할수도 있겠지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한국 20세기 후반기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구호나 가치체계들이 가깝게는 1968년 5월의 파리, 멀게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830년과 1848년 혁명, 그리고 1870년 파리꼬뮌의 구호나 열망들과 정확히 일치하는게 많다는걸 알게되면 프랑스의 이미지가 명품이나 포도주의 나라로서가 아니라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소중한 역사경험을 지닌 나라로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지.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