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품 중에는 별로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분청사기 항아리가 하나 있다. 국보 제177호인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했던 태항아리로, 정식 명칭은 <분청사기인화문태호>다.

 

조선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생명줄인 태반을 도자기에 담아 명당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태가 태아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태항아리는 주로 백자로 제작되었는데 본교 소장의 태항아리는 드물게도 분청사기여서 조선 초부터 태를 묻는 풍습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게다가 발견 당시 항아리 속에는 짚으로 짠 망태기나 명주조각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 태를 안태하는 방법도 잘 나타나 있다.

이 태항아리에는 사실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1969년 본교 애기능캠퍼스 근처에서 한 건설업체가 아파트 공사를 위해 땅을 파던 중 발견한 석함에서 정체모를 항아리가 나왔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윤세영 학예과장(9·11대 고려대학교박물관장 역임)이 즉시 공사 현장으로 달려가 공사 인부들에게 돼지 두 마리와 막걸리 10말을 주고 항아리를 가져왔다고 한다.

분청사기는 여말선초의 전환기에 등장한 특이한 도자기로서 화려하고 고상한 고려청자와도, 정갈하고 담백한 조선백자와도 다른 파격과 자유분방함으로 대변되어왔다. 실제로 청자나 백자와는 달리 분청사기는 전국각지에서 생산되었고 일반민들도 사용했던 가히 민족자기라고 할 수 있는 시대의 산물이다. 이렇게 서민적인 정취의 분청사기가 왕실유물, 특히 태항아리로도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분청이 서민층뿐 아니라 집권층에까지 고급기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항아리의 생김 자체도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뒷받침해준다. 당시 제작기술을 고려해 볼 때 이 정도 크기의 항아리가 가마 속에서 터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성공적으로 구워지기까지는 많은 공력이 들어갔을 것이다. 항아리의 표면 또한 상당한 정성이 필요한 방법으로 장식되었다. 도자기의 표면이 다 마르기 전에 국화문 도장으로 압인한 후, 그 파인 틈을 일일이 백토로 메운 인화기법을 적용한 것이다. 여기에 항아리의 어깨에는 연꽃잎 형태를 흑토로 상감하여 국화문이 가득한 흰 화면 위에서 절묘한 포인트가 되도록 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역사민속전시실 가장 마지막 코너인 도자실, 그 한 가운데 당당하게 자리잡은 <분청사기인화문태호>는 인화문 분청사기의 가장 세련된 작품으로 소탈하고 해학적이라 일컬어지던 조선시대 분청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송윤영 (본교 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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