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감독은 현대 모더니즘 영화작가의 대명사이다. 그의 영화는 대중성을 확보하려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규격화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안토니오니 감독의 시선은 언제나 평범한 일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삶의 모습이 논리적인 원인과 결과에 따라 진행된다는 해석을 거부한다. 때문에 그의 영화의 이야기 전개는 짜임새가 있다기보다는 느슨하며 모호한 결말에 도달한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겪는 인간소외와 고독, 의사소통의 불능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안토니오니 감독은 현대인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자신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특별한 사건에 초점을 두어 주제를 표출하기보다는 극중 캐릭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간다. 캐릭터간의 관계,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형상화해 현대인의 소외와 공허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절제된 편집, 균형감 있고 유려한 움직임의 카메라가 잡아내는 풍경은 캐릭터의 내면적 세계를 객관적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래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속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우연함과 복잡함으로 가득한 캐릭터들의 내면을 정교하게 담아내는 시적 공간이다.

안토니오니 감독의 초기 흑백영화들인 <정사L'Avventura,1959년>와 <일식L'Eclisse,1962년>은 그의 영화적 특성을 잘 드러낸 작품들이다. 사실 ‘정사’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개봉됐던 영화의 원제목의 뜻은 ‘모험’이다. 이 영화는 수많은 배반들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정과 사랑에 대한 배반에서부터 자기 자신의 재능과 인생에 대한 배반에 이르기까지 많은 배반들이 나오고, 원제목인 ‘모험’은 현대 물질세계의 공허함과 배반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의 삶이 마치 모험 같다는 비유이다. 배반이라는 표현은 안토니오니 감독의 작품 스타일에도 쓸 수가 있다. 그건 모더니즘 영화의 특징이기도 한데, 바로 관객의 기대 심리에 대한 배반이다.

<정사>는 미스터리 구조를 갖고 있다. 한 여자가 실종되고, 그녀의 친구와 애인이 찾아나서는 이야기이다. 보통의 미스터리 영화라면 도입부에서 제시한 의문이 결말에서는 풀려야 정상이다. 그러나, 관객이 아무리 기다려도 마지막 장면까지도 이야기의 비밀이 풀리지 않고 영화가 끝난다. 안토니오니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는 삶의 내면을 담아내는 것이고, 산다는 것 자체가 완결된 구조도 아니고 인과성도 없기 때문에, 굳이 영화가 모든 사건을 해결하고 설명해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식>은 ‘태양은 외로워’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개봉됐었다. 태양이 달에 가려서 잠시 동안 암흑이 되는 일식은 인간관계의 일식을 연상케 한다. 인간에게 일식은 서로의 대화가 단절이 되고, 결국 자기 식대로 개인주의화 되어 가는 침묵이다. 일식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모더니즘 영화가 나타내는 주관적인 개성과 개인주의, 내면세계의 탐구를 알 수 있다. <일식>에서 흥미 있게 보이는 것은 풍경이 하나의 인물처럼 묘사된다는 점이다. 교외의 현대적 건축물들은 물질문명으로부터 소외된 인물의 심리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식>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남녀가 만날 약속을 하고 난 후의 상황을 보여준다. 화면은 단지 늦은 오후에서 저녁까지 두 인물들이 만났던 장소들과 그들이 만날 때 스쳐지나갔던 사람들의 모습이 일상적으로 펼쳐질 뿐 주인공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안토니오니 감독은 주인공들이 빠져버린 거리의 풍경을 감정이 개입될 틈이 없는 객관적이면서도 냉정한 화면 구성을 통해 일식이 일어날 때의 암흑처럼 생명을 잃은 관계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감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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