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국어국문학과 교수인 내가 유학을 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 같다. 나 또한 석사 논문을 쓰기 전까지 유학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럼 내가 왜 유학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얘기해 보겠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국어학, 그 중에서도 한국어의 말소리를 연구하는 음운론을 전공했다. 석사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지적인 갈증을 느꼈다. 말소리의 물리적인 특성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해야만 이론의 수용자가 아니라 이론의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즉, 음성학 공부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당시 음성학은 국내 연구 상황이 열악했다. 연구를 지도해 주실 교수님을 찾을 수 없었다. 유학을 하지 않고는 나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딸의 뜬금없는 유학 선언에 부모님은 약간 당황하셨다. 하지만 내 고집을 잘 아는 부모님은 바로 반대를 하지는 않으셨다. 유학을 가고 싶다면 박사 과정에 진학해서 수료를 한 후에 가라는 일종의 회유책을 쓰셨다. 박사 과정을 수료하면 자연스럽게 그 열망이 현실과 잘 타협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 부모님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박사 과정을 최대한 빨리 수료하고 1년 정도 준비를 해서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유학의 목적지는 음성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런던대학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수료를 앞두고 있던 때, 런던대학 SOAS에 교환학생을 파견한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학부 1명, 대학원 1명을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1992년 가을, 런던대학에 가게 되었다. 교환학생으로 간 덕분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SOAS 동아시아 학과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나는 언어학과의 카트리나 헤이워드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교환학생이었지만 카트리나 선생님은 기꺼이 나의 지도교수가 되어 주셨다. SOAS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UCL에서 수강하면 좋을 강의들을 추천해 주셨고, 2주에 한 번씩 튜토리얼(tutorial)을 해 주셨다. 튜토리얼이란 교수님과의 일대일 연구 지도를 말한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SOAS 언어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영국의 학위 과정은 우리나라나 미국과는 매우 달랐다. 영국의 박사 과정은 일반적으로 수업을 들을 의무가 없다. 지도교수님과의 튜토리얼을 통해 박사 논문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박사 과정의 전부다. 강의를 들어야 할 의무가 없으니 방학이라는 개념도 없다. 교수님과의 튜토리얼은 학기 중이든 방학 중이든 계속 이어졌다. 박사 논문을 내는 과정도 아주 달라서, 박사 논문 제출 기한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 지도교수가 논문을 낼 만하다고 판단하면 논문 심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논문 심사를 하는 방식이다.

영국에서의 박사 과정은 전적으로 지도교수의 지도에 달려 있다. 그래서 지도교수님을 잘 만나는 것이 학생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의 경우는 정말 운이 좋아서 최고의 교수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카트리나 선생님은 모든 면에서 좋은 지도교수님이셨다.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욕만 앞서던 나를 잘 다듬어 학자로 만들어 주셨다.

1997년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카트리나 선생님은 한국에 가는 인편이 있을 때마다 내게 선물을 보내 주셨다. 하지만 정작 나는 교수님께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더 근사한 지위에 있어야 떳떳하게 연락을 드릴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다. 교수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2000년 늦은 가을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내가 낸 책과 편지를 보냈고, 교수님께서는 2001년 2월, 49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교수님의 사후에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속에는 교수님께서 내게 쓴, 다 맺지 못한 편지 한 통과 교수님의 묘소 사진, 그것을 설명하는 교수님 남편의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교수님의 묘소 사진은 오늘도 내 연구실에서 스승의 길을 알려 주고 있다.

신지영 문과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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