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목(許穆)의 전서(篆書)는 괴이하니 금지시켜야 합니다.”

숙종 8년 서인(西人)인 이조판서 이정영이 숙종에게 청한 내용이다. 허목(1595-1682)이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이기 때문에 서인인 이정영이 그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어째서 허목이란 사람이 아닌 그의 글씨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의 당시로서 파격적이었던 허목의 서체에 그의 정치적인 지향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서는 한자 서체의 발달과정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고대 중국의 하(夏)·상(商)·주(周)나라의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을 거쳐, 춘추전국시대 각 국의 글씨체인 대전(大篆),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정리한 글씨체인 소전(小篆)의 순으로 변화하는데, 전서라 할 때는 일반적으로 소전을 가리킨다. 그러나 허목의 전서는 금문·대전·소전 중 어느 것과도 같지 않다. 그의 글씨는 하나라 우(禹)임금의 글씨라고 알려진 하우갈(夏禹碣)이라는 비석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그가 창조해낸 것이다.

남인의 강경파로 송시열의 주요 정적이었으며 예송 논쟁의 논객이었던 허목은, 주자가 정한 사서삼경 중심의 성리학 공부법보다 원시 유학에서 중시한 육경(六經, 시․서․역․춘추․예기․주례)을 중심으로 한 공부법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학문을 고학(古學)이라고 일컬었다. 허목의 전서에는 이러한 그의 이념이 그대로 반영됐다. 유교적 이상 정치가 펼쳐진 요․순 시대와 가장 가까운 오래된 글씨체를 사용함으로써 그의 시대정신을 글씨체에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이지 않았던 그의 글씨체는 그의 사상과 더불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정승에까지 올랐던 허목은 정계에서 제거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본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592-2호 함취당(含翠堂) 편액은 허목의 대표적인 서예 작품이다. 정조 때의 남인 관료인 홍수보(洪秀輔)가 소장했다는 내력이 전해 내려와 허목의 정신이 남인들에게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일 한국 근대 대표적인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에 의하여 허목이 참고했던 하우갈은 후대에 위조된 비석으로 밝혀져, 그의 글씨체 역시 그가 꿈꾸었던 요․순시대의 글씨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이 알려졌다. 그러나 한 학자의 치열한 고민이 투영된 예술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변함이 없다.

본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석사과정 박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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