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떠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끊임없이 화제작을 만들어온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개인적 삶에서도 순탄함과 거리가 먼 영욕의 세월을 살아왔다. 1933년생인 그는 어린시절 유태인 어머니가 수용소에서 나치에 의해 처형당하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기도 하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폴란드 국립영화학교에 입학해 영화 공부를 하면서, 전위 연극 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부조리극에 심취한 영화학교 학생이라는 그의 경력과 정치적 박해를 받은 유태계 가족사는 감독의 독특한 영화 스타일을 형성하였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회의적인 운명론적 세계관은 그로 하여금 폐쇄된 공간에 몇몇의 등장인물들을 몰아넣고, 그들의 내부에 존재하는 본성을 미스터리, 스릴러, 공포 영화의 장르를 통해 예리하게 파헤치도록 한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에는 등장인물에 따라 영화 속의 사건을 해석하는 입장이 각각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한 사건을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시점으로 그려나가면서 진실의 상대성을 드러내는데 감독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물속의 칼,Knife in The Water,1962년>을 발표하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영화는 중년의 스포츠 기자와 그의 부인이 요트를 타러가다가 만난 한 청년과 함께 같이 배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감독은 단지 세 명의 등장인물을 요트라는 한정된 공간에 24시간 가둬두면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파워게임을 칼을 매개로 긴장감 있게 끌고 간다. 보트 안에서 벌어지는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발전되어가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막막한 바다에서 고립된 요트와 긴장 관계에 놓인 두 남자의 대립은 부조리극을 떠올리게 하는데, 폴란스키 감독은 부조리극의 미학을 이 영화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실험하고 있다. 하나는 대사가 극히 절제된 침묵으로 극을 끌어나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기능을 의심하고 거부한다. 또 다른 방법은 손으로 카메라를 들고 인물들을 찍어 불안정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핸드 헬드 카메라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허무감을 보여주고, 일반적인 거리감을 왜곡하여 거리감을 시각적으로 강조할 수 있는 광각렌즈(wide angle lens)를 사용하여 인물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건조한 일상사이로 초현실주의적인 이야기와 장면이 펼쳐지는 <로즈마리의 아기, Rosemary's Baby,1968년>는 공포 영화 장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함과 동시에 섬뜩한 두려움을 자아낸다. 영화는 뉴욕의 평범한 주택가인 아파트 풍경에서 시작하는데, 어느 날 여주인공인 로즈마리는 악마주의자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폭행을 당하는 환상을 경험한다. 그녀는 실제로 악마의 아기를 갖게 된 것을 몰랐지만, 점차 악마주의자들의 음모를 눈치 채게 된다. 하지만, 악마의 무리에 완강하게 둘러싸인 그녀의 저항은 절망적으로 그려지며, 결국 악마의 무리에 빠져들게 된다. 폴란스키 감독의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은 악이 활개를 치는 사회에 의해서도 억압을 당하지만, 악의를 지닌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는다. 이런 양면성이 두드러진 영화가 바로 <로즈마리의 아기>이다. 폴란스키 감독은 공포영화를 만들면서 여성을 욕망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놓고,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다룬다. 이런 식의 이야기에서 희생양으로 나타나는 여성은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널리 읽혔던 고딕식 소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감독은 악마로 하여금 여성의 모성애를 공격하게 만듦으로써 그로테스크한 공포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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