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시절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던 대학원 유학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1년간의 교환학생 경험 때문이었다. 교환학생 시절은 우리와 다른 문화를 경험하는 즐거움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졸업 후 학부 교환학생 대학이었던 사이먼프레이져 대학(Simon Fraser University)의 커뮤니케이션 석사과정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석사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명문대생’이라는 자만심 하나로 게으른 삶을 누리다가 이방인으로 낯선 외국에서 공부하게 된 나는 그야말로 언어적 장애와 지적장애를 겸비한 최하위 학생일 뿐이었다. 석사과정은 내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좋은 기회였고 유학생으로서 느끼는 ‘열등의식’은 나를 채찍질하는 긍정적인 자극으로 작용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펜실베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의 애넌버그 커뮤니케이션 스쿨의 박사과정에 진학한다. 밴쿠버에 이어 필라델피아라는 대도시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은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석사과정부터 인종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나에게 인종갈등의 역사가 깊은 필라델피아는 최적의 배움터였다. 박사과정 시절에는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무척 생소한 주제였던) 성소수자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성소수자 문제를 미디어의 문제와 함께 고민했던 학교 교수님들의 영향력이 컸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성소수자인권운동역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으로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크게 형성된 지역이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필라델피아의 트랜스젠더들의 사회적 차별의 문제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고 이 작품이 필라델피아의 공영방송에 방영되기도 하였다. 이는 내가 향후 다큐멘터리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제작할 수 있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박사과정에는 대단히 우수한 학생들이 많았고 학생들 간의 경쟁도 심했다. 내 세부전공은 대중문화였고 이 전공을 택한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미국학생들이었다. 경쟁심이 강한 성격은 아니지만 미국학생들에게 무시당하기 싫어 연구주제를 선택할 때도 미국학생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국의 주제보다는 미국의 주제만을 선택했다. 미국학생들보다 미국의 사회문화 현상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경쟁자는 언제나 미국인들이었고 유색인으로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내 노력의 원천이었던 것 같다. 박사과정 중 Journal of Communication이라는 커뮤니케이션 분야 최고 수준의 학술지에 당당히 논문을 게재한 적이 있었는데 미국학생들 앞에서 무척 우쭐거렸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보면 내 유학의 가장 큰 수확은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견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그들의 삶의 맥락에서 이해하게 되면서 차이와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바쁜 박사과정 중에서 현지문화를 적극적으로 이해할 여력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에 대한 노력이 없다면 유학생활의 장점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도서관에서만 하는 공부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학시절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면 현재 미디어학부에서 ‘다문화사회와 미디어’라는 수업을 강의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은 혼자 필라델피아의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관찰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젠가 공부에 지쳐 친구와 시내의 바에서 맥주 한 잔을 하고 나오는 길에 총을 든 무장강도에게 돈을 털린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재미있는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박지훈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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