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독해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최불암이 의기양양하게 답을 써내려갔다. 문제는 이러하다. The commander said, "Fire." 과연 최불암이 쓴 답은? "코만도가 말했다. '불이야!'라고." 물론 우스개 소리다. 앞차의 뒷 유리에 붙은 'I love God!'라는 스티커를 본 예닐곱 남짓한 꼬마가 외친다. "엄마, 나 저거 읽을 줄 알아. 아이 러브 지오디." 이것은 웃자고 꾸민 얘기가 아닌 현실에서 목격한 일이다. 대중문화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지배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그저 아주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대중문화는 나와 너무 밀접하게 붙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을 얼마나 많이 지배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아침에 눈을 떠서 라디오나 컴퓨터를 켜거나 신문을 읽는 순간부터 대중문화와 함께 삶을 시작한다. 옷장에서 옷을 고르고 양말과 신발을 신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거의 모든 일상이 대중문화와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중문화는 신비감도 없으며 뭔가 대단하거나 심오한 것으로 느껴질 턱이 없다. 
 무엇이든 그것이 너무 가까이 있거나 일상적으로 직접할 수 있는 경우에 신비나 경외감은 생기지 않는 법이다. 숱한 신문기자와 정치인, 문인들을 배출한 대학자였던 내 은사님도 간혹 신문에 난 기사를 반박하는 이야기를 할 때면 주변의 친지분들이 오히려 기자들의 기사를 신뢰하고 당신의 말씀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는 푸념에 놀란 기억이 있다. 하물며 대중문화의 경우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대중문화야말로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것에 철학적 방법론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워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중문화에 대한 신중한 분석이 더욱 필요하다. 사람들의 사고나 행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위대한 사상가의 철학이나 고상한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취향에 의한 취사선택의 대상인 옷이나, 음악, 특정 채널,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야말로 우리의 사고나 행동을 가장 많이 지배하고 있는 요소다. 말하자면 대중문화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저 만만하게 보이는 대중문화의 뚜껑을 열어보면 그 속에 감춰진 복잡하고 체계적인 담론들의 그물망을 보고 아연실색하는 것도 그 이유인 것이다.

 한 예로 프랑스의 해체철학자 자크 데리다와 20세기 말의 록 가수 커트 코베인을 들어보자.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방법론에서 데리다가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가령 "회화에서의 진리"라는 책에서 그는 예술작품에 대한 기성의 가치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그는 예술작품에서 전통적으로 무시되던 '파레르곤'의 가치에 주목한다. 파레르곤이란 전통적으로 예술작품에서 주변적인 것으로 무시되던 요소다.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에서 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그림 자체이지 어떤 액자에 표구되어 있는가가 아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작품성을 결정하는 것은 활자로 인쇄된 글이지 어떤 디자인에 어떤 표지로 장정되어 있는가가 아니다. 책의 표지, 그림의 액자 등은 예술작품의 본질과 무관한 주변적인 것이며 파레르곤에 해당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반전은 파레르곤이 결코 예술작품의 본질과 무관한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가령 같은 영화라 하더라도 조명과 음향시설이 완벽한 극장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티비 화면을 통해서 보는 것은 다르다. 같은 줄거리라도 느낌이 다르면 의미도 완전히 달라진다. 극장 스크린이냐 티비 화면이냐는 비본질적인 파레르곤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변하므로 결코 작품의 의미와 무관한 작품(혹은 텍스트)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예술작품 혹은 모든 텍스트는 그 고정된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독자의 의무라는 생각 자체가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말하자면 텍스트와 안과 밖이라는 고정된 실선 긋기야말로 우리의 사고를 가두는 근대적 사유의 감옥인 것이다.

 데리다가 위반적 글쓰기를 통하여 어렵게 전투에 나서서 그나마 추상적 개념에 단련된 지식인들에게 한정된 영향력을 끼쳤다면,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그러한 위반과 반역을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직접 일반 대중들에게 유포시켰다. 너바나의 음악은 주류 록 음악에 대한 거부의 전통을 이어 온 펑크 음악을 계승하면서도 주류 음악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경계를 걸치고 있다. 겉으로는 단순히 90년대 판 히피 음악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코베인은 펑크 음악적 영향 속에서도 장음계와 단음계의 명확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독특한 음악적 체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그의 음악은 전통적인 음과 소음의 구분을 넘어서 그것의 경계마저도 허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코베인의 음악은 전통적인 의미와 무의미의 구별을 허물고 있는 셈이다.

 서양 음악의 본질성이라고 할 수 있은 조성 tonality을 파괴하고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창출하였다는 이유에서 아도르노는 쇤베르크를 20세기의 진정한 혁명가로 불렀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커트 코베인은 쇤베르크 못지 않은 혁명가이며, 대중들에게 미친 파급효과로 보자면 오히려 쇤베르크에 비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너바나 음악 속에 담겨진 엄청난 담론의 그물망들이 하나도 들춰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대중문화가 하나의 확고한 학문적 분석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문화 자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은 신중하고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은 대중문화를 분석하기 위한 방법론적 틀을 다듬는 일이다. 너바나의 음악이나 서태지의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 철학적 방법론은 필요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이 갖는 의미를 들춰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법론적 검토의 절차가 필요하다. 가령 서태지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 부르디외의 예술론과 나티에의 음악 기호학, 그리고 칼 도이취의 음악 현상학이 필요한 것은 현학적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대중문화야말로 알고 보면 그 속에 무궁무진한 사회적 담론들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철학적 이론이나 학설을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서가 아닌 그 자체 독립된 하나의 장 field으로써 대중문화에 대한 탐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박영욱(단국대 연구교수, 사회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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