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정아윤 기자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나눔의 집’에서 이옥선 할머니를 만났다. 1927년 부산에서 출생한 이옥선 할머니는 17살에 일본군에게 잡혀 중국 옌지로 끌려갔다. 비행장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다 위안소로 끌려가 3년간 일본군 위안부를 강요받았다. 해방 이후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머물다 2000년 6월 한국으로 돌아와 나눔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다.

12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이 할머니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갈 수 없었다. 15살에 양녀를 삼아주고 학교도 보내주겠다는 말에 속아 일본인 부부에게 갔지만 돌아온 것은 식모살이와 구박뿐이었다. 주점을 운영하던 부부는 할머니에게 접대부 일을 시키려고도 했다. “마구 저항했어, 절대 못한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벽을 쳐대면서 난리를 쳤지” 일본인 부부는 결국 할머니를 울산 기생집에 팔아넘겼다. 접대 강요와 고된 식모살이는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그 시절을 “나라를 잃은 국민에겐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한날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에 만난 일본군은 할머니를 대뜸 끌고 갔다. “이름이 뭐냐, 어딜가냐, 이런 말도 없어. 그냥 다짜고짜 내 양 팔을 잡고 트럭에 내동댕이 쳐버렸어. 정말 아무도 모르게 끌려간거지” 당시 할머니는 17살이었다. 온몸이 묶인 채 달리는 트럭과 기차에 실렸다. 밤새도록 기차가 달려 도착한 곳은 중국 국경, 그 곳에서 맞은 밤은 차갑고 무서웠다. “커다랗고 새까만 방에 혼자 놔뒀어. 그때 추운 방에서 다리가 잘못됐는지 아직도 고생을 하고 있어” 할머니는 얼마 전 두 다리를 모두 수술 받았지만 아직도 거동이 불편하다.

할머니가 도착한 곳은 중국 연변의 비행장. 수백 명의 조선인이 전기 철조망 안에 갇혀 일본인 순사의 감시를 받으며 강제노동을 했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거나 말대꾸를 하면 주먹부터 날아왔다. 매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고, 음식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제공됐다. 도망치려했지만 전기철조망을 소녀가 뛰어넘을 순 없었다. “한 방에 있던 사람들끼리 마구 난리를 쳤어. 벽돌을 때리고 소리를 지르고 고향에 보내달라며 울며불며 난리를 쳤지” 항의를 하는 할머니를 본 일본군은 ‘어쩔 수 없으니 고향에 데려다주겠다’고 했고 할머니는 소녀 몇 명과 덥석 따라나섰다.

▲ 사진 | 정아윤 기자

며칠 밤을 걸어 도착한 곳은 고향이 아닌 일본군 위안소였다. 이옥순 할머니는 “거긴 사람 잡는 도살장이야. 무섭고 끔찍한 일들이 정말 많이도 일어났지”라며 조심스럽게 위안소 이야기의 운을 뗐다. 할머니가 전하는 위안소 시절은 귀로 직접 듣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참혹했다. 주인은 초췌한 몰골의 소녀들을 목욕시키고 새 옷과 신발을 줬다. 그게 곧 빚이 됐다. 주인은 돈을 갚아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빨리 돈을 벌라고 했다. 하루에도 4~50명의 일본군을 상대해야했다. 저항하거나 도망가려는 낌새가 느껴지면 칼부림이 돌아왔다. 도망가다 잡힌 여자를 산 채로 세워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칼로 째는 것을 두 눈으로 본 일도 있었다. 이옥선 할머니 역시 도망가려다 잡혔을 때 발을 잘릴 뻔했고 자궁을 들어내야 했다. 아직도 할머니 팔 다리 곳곳에는 지울 수 없는 칼자국이 남아있다. 온갖 핍박을 받았고 식사는 조밥에 산에서 베어온 풀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여의치 않았다. “내 얘길 듣고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해. 하지만 이게 진짜 역사야. 지금 역사교과서에는 역사가 없어”

해방 이후 후퇴하는 일본군은 할머니를 위안소에 그대로 버리고 갔다. 해방이 온지도 모르던 할머니는 위안소를 나와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고국에 돌아가고 싶어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가봐야 무얼하겠느냐’는 생각이 할머니를 가로막았다. “가족들 중에 위안부 생활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아직 우리 할머니들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안타까운 현실이지” 할머니는 조선인 남자와 결혼해 육십 평생을 중국에서 살았다. 2000년 6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부모님과 형제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조그만 체구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지만 이옥선 할머니는 “일본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한다”고 강단 있게 말한다. 할머니는 일본정부에 강력히 주장하지 못하는 한국정부의 태도를 호되게 나무란다. “우리는 절대 스스로 간 게 아냐. 17살짜리가 뭘 알고 거길 가겠어. 일본정부의 주장은 다 틀려. 할머니들이 모두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우리 정부가 나서서 꼭 사과를 받아내야 해”

할머니는 요즘 정말 바쁘다. 전국 뿐 아니라 미국, 일본, 동남아 등 전 세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 강연을 한다. 할머니의 강연을 들은 전남대 학생들은 할머니를 ‘역사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할머니의 일을 접하고 응원해주는 외국인들도 많다. 5일엔 1000차 수요시위 맞아 미국 여성인권단체와 함께 시위를 벌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열혈 인권 운동가로 활동 중인 이옥선 할머니는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 그렇게 고생을 하고 이정도 살면 오래산거지. 우린 말이라도 했지만 먼저 간 할머니들은 얼마나 한을 품었겠어”라며 “죽는 날까지 일본 정부와 싸워 꼭 그 한을 풀고싶어”라고 말한다. 기생집, 강제노역장, 위안소에서 목숨을 걸고 뛰쳐나왔던 소녀의 용기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했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