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피해자로서 자신의 모습 을 드러내는 일은 ‘커밍아웃(coming out)’ 행위에 비유되고는 한다.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각오해야 하듯이, ‘위안부’ 피해 여성 또한 자신의 피해를 밝히기까지 많은 것을 고민하고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힌 그녀들의 ‘용기’에 주목해야 한다. 그녀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몸과 마음에 각인된 고통에 대해 말하지 못했으며, ‘더러운 몸, 수치스러운 몸’이라는 주위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성폭력에 맞서 싸운 피해 여성들의 용기 있는 문제제기가 50여년 동안 쌓인 뒤에야 그녀들은 비로소 그 고통이 ‘성폭력 피해’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분노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하였을 때, 그녀들의 용기는 더욱 더 커질 수 있었다.

‘위안부’ 생존자들은 전쟁 중의 ‘위안소’ 생활에서 살아남고, 전쟁 후의 세상의 소외에서 살아남아 그들이 겪은 일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올리고야 말았다. 생존자들은 먼저 죽어간 동료들에게 책임감을 느꼈으며, 전쟁이나 무력갈등 하의 지구촌 어딘가에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을 하였다. 그리고 반복되는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용기가 더욱더 필요함을 알았다.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제국주의 일본이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전쟁기간 15년 동안 시행했던 제도이다. 병사의 성병예방 및 일반인 여성에 대한 병사의 강간방지, 군기밀유지라는 명분으로 식민지 및 점령지, 본국(일본)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병사들의 성적 ‘위안’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시기 일본만이 제도로 두었던 점이 특징이며, 일본군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존재했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평온한 느낌을 주는 ‘위안’이라는 호칭과 달리, 여성에 대한 폭력을 생산하고 체계화한 것이었다. 20세기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시 성노예 사건으로 기록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전쟁 승리와 국익옹호를 명분으로 국가가 직접 성노예 제도를 고안하고 관리했다는 점에 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았던 전시 성노예제도는 여성에 대한 국가의 최대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위안소’가 당시 일본에 의해 허가된 공간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 곳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고통의 이야기들이 은폐되었으며, 가해자는 가해책임을 회피하였다.

‘위안부’ 생존자들의 용기는 ‘위안소’의 기억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재구성하여 ‘위안소’제도의 본질을 폭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나아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낳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전쟁의 반인간적 속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였다. 그리고 가해자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 미래를 향한 역사교육이 이 모든 비극을 끊어내는 출발점이 되리라 강조하였다.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녀들만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이며, 어쩌면 앞으로 우리들의 것이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이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안부’ 피해여성들의 용기에 보태는 우리들의 용기는 바로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애(정대협 전쟁과 여성인권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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