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인 친구 3명과 플랫(서양식 하숙집)을 나눠 쓰는 스페인 친구들과 함께 중국인 친구가 만들어준 중국식 탕면 식사는 정감이 넘쳤다.
8월 22일부터 12월 1일까지 4학년 되기를 앞두고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딱 이때쯤 1년 휴학을 결정했고 겨울방학부터 과외, 알바를 뛰기 시작해 6개월째 됐을 때 한국을 떴다. 돈은 약 550만 원 정도 벌었고 그 절반을 비행기 값으로 쓰고 나머지 경비로 3개월간 유럽을 여행했다.

여자 혼자 출발한 여행이었다. 떠나기 전 약간의 걱정은 있었지만 막상 가보니 그런 여자들이 세계적으로 수두룩했다. 혼자 있기에 흥미진진한 일이 더 많았다. 출발만 혼자였지 항상 누군가와 함께 했다. 동행 있는 사람보다 혼자 있는 사람에게 말 걸기가 쉽고, 같이 돌아다니기도 편해서 즉석동행이 생기는 일이 많았다. 너도 혼자 왔냐며 나도 혼자 왔다고 프랑스, 영국, 폴란드, 일본, 타이완, 중국,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친구를 만들어 같이 여행했고 오스트리아와 영국에 교환학생 간 친구 집에 머물 수 있었다. 현지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생생 가이드를 받았고 집에 초대 받아 진짜 그 나라 사람들이 먹는 식사를 대접받았다. 여행 중 이스탄불에서 만난 중국인 유학생 친구와 스페인에서 다시 만나 놀기도 했다. 그녀가 만들어준 중국탕면의 깊은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스탄불 호스텔에서 아침 먹을 때 잠깐 만나 이메일만 교환했던 사이였다. 그런데도 단짝 친구네 집에 간 것처럼 3일 밤낮을 놀았다. 동양인 친구들과는 한자로도 대화하고 몇 가지 단어는 발음이 똑같은데다 사고방식이 비슷해서 죽이 척척 맞았다.  

이 때 영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와 ‘오’로 모든 감정과 의사표현, 심지어 의견까지 낼 수 있었고 고맙다는 말만 현지어로 알고 있으면 모든 문제가 술술 풀렸다. 하루는 미국인 친구와 ‘wow’와 ‘yes’, ‘oh!’ 3단어로 30분을 대화하곤 했다. 그리하여 여행결과 영어는 늘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빨이 엄청 증가해 ‘어느 나라 여자가 이쁘다더라’부터 유럽 경제위기에 대한 심도 높은 영어토론도 알아듣게 됐다.

여행을 해야 되는 이유중 하나는 세계평화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2주일을 같이 다닌 일본인 친구가 원전사태로 심해진 경제위기를 걱정하며 자국에 돌아갈 날 걱정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고, 터키를 여행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동부지역에 지진이 발생했고, 콜로세오(Colosseo)를 갔다 오자 내가 걸었던 그 자리에서 치열한 유혈시위가 벌어졌다. 유럽 경제위기도 내 가방을 노리는 소매치기의 증가와 유로화 환율, 일주일에 절반은 닫고 운영하는 스페인 레스토랑으로 느꼈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우울함은 그들의 표정과 서로간의 대화로 와 닿아 리스본에 있는 5일 내내 나도 우울했다. 도시의 많은 빈 집들, 동전통을 압력밥솥 꼭지 흔들리듯 흔드는 걸인들과 대낮에 샹그리아병을 들고 마시는 젊은이들을 보며 유럽경제위기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화장실 변기부터 거꾸로 가는 좌석까지 생활 전반에 걸쳐 했던 다른 경험도 내 자신과 살아왔던 환경을 다시금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의자뚜껑 없는 좌변기에서는 삶의 겸허함과 인내심을 배웠다. 그 변기가 공중화장실만이라면 이해됐겠다. 그러나 박물관 고급 화장실에다 심지어 자동감지로 물이 내려가는 센서는 폭포수에 몸을 담근 것 마냥 매초 상쾌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그런 화장실을 돈 내고 들어가야 한다. 잔돈이 없던 어느 날, 급했으나 씁쓸히 돌아서야했다.

▲ 하이델베르그에 있는 겨털카드

유럽의 교통수단은 마주 보고 앉는 좌석이 많다. 우리나라 기차는 돌려 앉는 게 수동식이지만 고정식인 유럽에선 앞사람을 보며 거꾸로 가야 한다. 버스에 전차까지 마주봐야 해서 처음엔 멀미로 구토도 할 뻔했다. 터널을 통과하는 기차 안에 선글라스를 쓴 사람도 있었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을까. 눈만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 유럽인들과 함께 하며 나 역시 어색한 미소를 자연스럽게 연습해 갔다.

물 먹는 것도 일이었다. ‘mineral natural water’에도 가스가 미지근히 들어간 물이 있고 나라마다 병색깔로 물을 구별하는 곳도 있어서 항상 물어봐야했다. 사이다에만 익숙해서 가스물을 먹는 내 혀는 자꾸 설탕맛을 찾으려 했다. 석회질 물이라 정수기도 소용없는지 학교나 사무실도 공짜 물은 먹을 수 없었다. 1.5리터짜리 생수를 가방에 꽂고 다니는 대학생들을 보며 새삼 정수기 있는 우리학교가 좋다는 생각도 했다.

대학생의 가난한 주머니로 머문 숙소는 기숙사처럼 한 방에 여러 침대가 있는 호스텔이다. 전 세계 여행자들과 거실, 부엌을 나눠 쓰며 생활을 같이 하다 보니 동양인 여행자와 서양인 여행자의 생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면 그 때부터 서양 친구들은 씻고 머리 왁스 바르고 옷 빼입고 데오드란트를 뿌린 후 밤 생활을 하러 밖에 나간다. 오전에 아침 먹으려고 일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동양인이다. 아침 식사량도 다르다. 규모가 큰 유스호스텔은 뷔페식 아침식사일 때가 있는데 간단히 시리얼 한 그릇만 먹는 서양 애들이 두 접시에 빵, 시리얼, 수프, 과일 각종 샐러드를 챙겨 담아 우유, 쥬스, 커피까지 알뜰하게 챙겨 먹고 점심 샌드위치까지 싸가는 동양 여행자들을 보며 감탄하는 모습도 종종 보았다.

한국 여행자가 특히 심했다. 한인민박에 머물렀던 날들은 오전 7시에 강제 기상 당했다. 9시에 일어나도 다들 자고 있던 호스텔과 달랐다. 7시에 부산스럽게 일어나 동시에 씻고 먹고 깨알 같은 화장을 하고 다 같이 나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지런함은 감탄을 토해낼 정도였다. 짧은 휴가에 유럽을 와서 뽕을 뽑고 싶은 직장인 여행객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여유가 있는 대학생일 때 여행 온 게 참 잘했다 싶었다. 돈보다 시간의 여유가 여행을 여행답게 만든다.

그 여유가 유럽 여행을 하며 배운 최고의 선물이었다. 어떤 이가 ‘여행은 시간의 헛된 소비가 아니라 시간을 다시금 음미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날짜와 요일을 잊고 돌아다니며 얻은 여유는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왔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 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11시간 걸리는 버스나 6시간 걸리는 기차를 타도 너무 많은 생각들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 허예진 객원기자

하지만 그 유럽의 여유 때문에 굶을 뻔 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슈퍼 닫는 시간이 철저해서 주중엔 7시, 토요일엔 1시에 닫고 일요일엔 열지 않는다. 그 사실을 모르고 토요일 밤에 도착한 오스트리아의 첫 날, 닫혀 있는 슈퍼 문 앞에 눈물을 훔쳐야 했다. 일요일은 더해서 레스토랑을 포함한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교통수단의 배차 간격이 2시간에 한 대 꼴이 된다. 스페인의 낮잠 시간인 시에스타(오후 2시~4시)엔 거리에 사람이 없고 관광지마저 문을 열지 않는다. 동행했던 한국 사람들은 여기 사람들이 돈 벌 생각 없다고 불평했지만 내게 그들의 모습은 자신의 여가생활을 당당히 챙기는 여유로 보였다. 내가 놀고 자고 있는 시간, 가족과 함께 있지 못하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금 생각할 기회가 됐다.

유럽이 여행하기 가장 좋은 지역 중 하나인 까닭은 문화와 예술을 잘 보존하고 배울 수 있게 조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미술관엔 작품 앞에 무릎 꿇고 설명하는 선생님이 있고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아 질문하는 초등학생들이 있다. 그림 앞에 누워 작품을 따라 그리는 어린 소녀도 있었다. 교과서에 있는 작품이 자기 나라 박물관에 있는 것도 부럽지만 그 작품을 자기네 안방에 있는 그림처럼 편하고 재밌게 배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 배움의 기회가 만 26세 미만 대학생에겐 공짜인 곳이 많다. 박물관과 문화유산지역, 숙소에 기차표까지 학생에겐 반값이거나 큰 할인을 해준다. 장기여행의 기회도 학생에게만 주어진다. 짧은 휴가에 모든 걸 다 보고 싶어 눈으로 후딱 보고 빨리 도시를 스치는 여행자들을 보며 졸업 전 여행한 것이 참 잘 했다 싶었다. 여행을 가고 싶어 망설이고 있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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