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감독은 데뷔작인 <열혈남아,熱血男兒 1988년>를 통해 성공하지 못한 평범한 뒷골목 건달들의 세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20대의 한 건달은 별 볼일 없는 뒷골목 삶을 살다가, 사랑을 하지만 그 사랑도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비참하게 과거의 기억을 상실한 채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왕가위 감독은 이런 모습을 통해 영웅보다 실패한 인생의 아픔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혈남아]는 고전적 필름 느와르의 흑백이 강한 대비를 이루는 조명효과를 푸른색으로 비추는 형광등 조명으로 바꿔 사용함으로써 고전적 필름 느와르의 스타일을 감독 자신의 스타일로 변형시키고 있다. 또한, 슬로우 모션을 통해 실제 액션이 일어나는 시간을 변형하고 강조하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스타일도 엿보인다. 이 영화는 당시 홍콩 액션 영화의 주류적인 흐름보다는 유럽의 예술 영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1960년대 프랑스 뉴웨이브(French New Wave)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성난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실패로 끝날 예정된 비극을 지닌 사랑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외된 젊은이들의 모습은 <아비정전,阿飛正傳,1990년>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왕가위 감독은 좀더 세련된 스타일로 유럽 예술 영화의 스타일을 소화해내고 있다. 모더니즘 영화의 일반적 주제인 개인 간 의사소통의 부재를 사랑이라는 소재로 감각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정전>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홍콩에서 계모 슬하에서 자란 청년이 필리핀에 사는 생모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극적인 리듬감을 갖고 이야기가 전개되기 보다는 다양한 인물들과 작은 사건들이 서로 병렬적으로 어우러진다. 그러기에 영화에서는 부모나 연인, 친구처럼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중요시된다. 이를 통해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다소 우울하고 끈적끈적한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은 분위기에 젖어들게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자 생모를 찾아가는 주인공 청년은 발 없는 새에 대한 우화를 들려준다. 발 없는 새는 바람 속에서 쉬고 죽을 때에만 땅에 내려앉는다고 말하는데, 이는 자신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느 것에도 정착할 수 없는 사람들의 소외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비정전>은 이렇게 등장인물들의 심리적인 묘사에 치중하기 때문에, 숨 가쁜 액션과 긴장감 넘치는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이 자제되어 있다. 대신 긴 호흡의 화면과 등장인물의 감정을 끌어가는 느린 템포가 주로 쓰이고, 무더운 여름날의 권태로움 느낌을 푸른색의 어두운 조명의 톤으로 이끌어간다.

왕가위 감독은 <동사서독,東邪西毒,1994년>에서도 어긋나는 사랑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한다. 이 영화에는 네 명의 무사와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결국은 이루지 못한다. 그들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은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먼저 연인을 떠나버리거나 사랑의 감정을 스스로 숨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뒤로 긴 세월동안 서독처럼 먼 사막으로 숨어 들어가거나 동사처럼 술에 취해, 사랑의 상처를 달래며 힘들게 살아가야 한다. <동사서독>에서도 다양한 영화적 전통들이 녹아나 있다. 우선 액션 장면에서는, 중국의 전통연희극인 경극과 전통 문화, 전통 산수화에서 얻은 영감을 자신의 홍콩 무협영화에 옮겨놓은 호금전 감독 영화에서 비롯된 경극의 동작을 응용한 무사들의 연기가 눈에 띈다. 야외 촬영에서 사막을 묘사할 때 여백을 중시하는 열려진 화면 구도와 실내 장면에서 인물을 꽉 찬 구도로 잡고 거의 정지된 화면을 만드는 것 등은 유럽 예술 영화 감독들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지만, 왕가위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부분은 속도의 이미지를 화면 안에 포착할 때인데, 결투 장면들을 스텝 프린팅이라는 광학적인 처리 과정을 통해 슬로우 모션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로 이런 속도의 이미지는 시간의 변화를 연속된 동작 속에 나타내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갈등과 운명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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