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고대신문’이라는 같은 시간을 거친 사람을 만난 고대신문 기자들의 이야기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여기에도 초조한 청춘들이 있을 뿐이다.

1983년, 대학생이었던 남자는 매주 월요일 까만 칠판에 ‘編輯會議(편집회의)’라 적었다. 그는 신문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매주 결과물을 손에 쥘 때마다 그는 인내와 열정, 결단 같은 것들을 배웠다. 벌써 삼십 년이 지나 그가 앉았던 자리와 까만 칠판은 없어졌지만 그는 예전 그 자리, 고대신문 편집실 안에서 그 시절과 다르지 않은 성마른 청춘들을 보고 있었다.

부랴부랴 편집실 청소를 마친 고대신문 기자들이 한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편집실 안으로 들어온 박웅현(신문방송학과 81학번) 씨는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의 표지에서보다 더 마르고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남달라 보였다. 몸에 붙는 니트를 입고 희끗한 염소수염에 피어싱을 한 모습부터, 기자들이 급하게 준비한 화이트보드를 채울 만큼만 질문을 받아 대답하겠다는 이야기 방식까지.
약간 얼이 빠진 기자들의 정적이 지나고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진 이는 편집국장이었다.

“편집국장이 되셨을 때 가장 바꾸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고, 어떤 마음가짐이었습니까?”

우리 때는 월요일에 신문 작업 마무리를 하러 갈 때까지 원고마감이 안 됐어요. 결국 매주 새벽이 돼서야 작업이 끝나는 거야. 그게 제일 바꾸고 싶었던 거였어요. 그래서 첫 회의 때 마감 시간 넘기면 원고 안 받는다고 했는데 또 마감이 넘어가서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연락이 왔어. 대부분은 여기서 그냥 넘어가는데, 난 그 기사 빼버렸어. 욕 많이 먹었지.

박웅현 교우가 고대신문 편집실에서 학생기자를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있다.

 

2012년 신년호로 임기를 시작한 편집국장은 고대신문에 여러 변화를 시도해 보는 중이다. “인생은 장담하는 게 아니야. 해봐야 하는 거지.” 책임과 권한을 분배한 덕분에 일이 많아져 징징거리는 기자들에게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기자 땐 진짜 아무 생각도 없었어. 주인의식도 없었고 마음도 이미 고대신문 밖에 가 있었으니까. 너희들도 마음속 고대신문 이탈률은 거의 90%일 걸. 근데 내가 만들고 싶은 신문은 다 같이 고민해서 만드는 신문이지, 편집국장 혼자 만드는 신문이 아니야.”

그러나 그 밑의 기자들로서는 일이 많아진 만큼 변화가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변화는 정기자들에게 느닷없이 지면을 하나씩 책임지게 하고는, ‘국제’니 ‘공감’이니 하는 키워드를 던져주며 내용을 알아서 채우게 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덕분에 한동안 여자 정기자들의 화두는 단연 편집국장 욕하기였다. “여기가 구글이나 페이스북인 줄 아는 것 같아.” 하지만 그의 마음에도 역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는 같다. 박웅현 씨의 책을 많이 읽는가 싶더니 결국 박 선배를 신문사로 초청했으니 말이다.

근데 욕먹어도 어쩔 수 없어. 선택과 집중이야. 원칙을 정해놓고서도 하나씩 양보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봐요. 애초에 선택을 하지 말든지, 일단 선택을 했으면 뒤돌아보면 안 돼요. 이것밖에 답이 없는 것처럼 집중해야 해. 그런 마음가짐으로 했어요.

물론 그는 “너희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지. 내가 하는 말은 안 들으니까 다른 유명한 사람의 말을 빌려서 하는 거지”라고 말했지만 자신과 같은 시간을 거쳤던 사람을 통해 확신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꽤 성공적이어서 요새 그는 자신감에 차 보인다.

인생은 마라톤이에요. 지금 여러분은 12km 지점 정도 지나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여기서는 서울대 간 친구가 좀 더 앞서나가고 있는 것뿐이야. 근데 그럼 난 지고 승부 끝난 거야? 아니지, 그냥 그 지점을 통과한 거죠. 그냥 내 페이스대로 계속 달리면 되는 거예요. 끝에 가면 승부가 있을까? 그것도 모르는 거지. 그렇게 멀리 봐야 하는 게 인생이에요.

고대신문 기자 생활뿐 아니라 다른 활동들에도 항상 충실하게 부지런한 정기자 ㅇ. 정기자 중 가장 많은 기사를 쓴 그녀는 최고의 능력자다. 그녀는 다른 기자들이 학점을 챙기기는커녕 수업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그 바쁜 와중에도 20학점을 성실하게 수강했고, 이번 방학에도 신문사 교육을 받으면서 중국어 학원에 다녔다. 고대신문 활동을 마친 후에는 경영학회에도 들어갈 예정인 그녀는, 한편으로는 걱정이 될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며 노력하고 있다.

스펙을 위한 스펙 쌓기는 무의미한 소모전이야. 인생 삼십까지만 살 거면 그런 스펙만 쌓아. 근데 혹시라도 팔십까지 살고 싶거든 본질을 보세요. 스펙 관리와 본질이 완전히 떨어질 수는 없지만, 스펙이란 포장만으로 인생이 계속 빛날 수는 없어요. 스펙을 위한 스펙을 쌓을 게 아니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당신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를 품어야죠.

“나랑은 좀 동떨어진 얘기로 들렸어. 먼 나라 얘기? 그 사람 시절하고 우리 시절은 취업 상황이 많이 다르잖아.”

박웅현 씨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어땠냐는 질문에 가장 먼저 튀어나온 그녀의 솔직한 반응이다.

“근데 일리는 있는 말 같아. 눈앞에 닥친 현실만 봤지 내가 백 살까지 살 거니까 멀리 봐야겠다는 생각은 못해봤어. 그렇다고 아예 스펙을 안 쌓을 수는 없으니까, 사는 동안 항상 본질적인 걸 찾아가자는 마음가짐으로 균형을 맞춰보려고.”

여전히 똑 부러지는 그녀의 덧붙임. 어쩌면 가장 바람직하면서 가장 어려운 방법일 것이다. 이번 학기에 4학년이 되는 08학번 정기자 ㅎ은 요새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다. 정기자 중 유일한 자연계열 출신으로 자연계열 관련 기사의 양을 늘려놓은 그녀지만, 정작 고대신문에 들어오기 전까지 언론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2학년 때 아주 막연하게 ‘PD는 어떨까’ 생각했지만 그건 <외과의사 봉달희>가 방영된 이후 많은 청소년들이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상상을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막연한 생각을 접고 관련 분야로 취업 준비를 하려 했던 그녀의 방향을 바꾼 것은, A4 용지 반 장짜리의 작은 종이에 깨알같이 인쇄된 고대신문 수습기자의 일기였다. 그것도 외진 도서관 화장실 한켠에 붙어 있던.

대학생 때는 신문사나 방송국에 입사하고 싶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미디어를 통해 컨텐츠를 생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딱 신문기자로 정한 게 아니고 PD, 카피라이터, 소설가 다 생각할 수 있었던 거죠. 스트라이크 존을 그렇게 좁혀놓지 말아요. 인생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진 않아. 우선순위를 정해놓고서 그거 못하면 인생 끝난 건가? 아니잖아. 모든 인생이 최선으로 가느냐 아니냐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범위 안에서 최선을 찾아내느냐가 문제인 거죠.

그렇게 고대신문에 입사한 것이 벌써 1년 전. 이제는 전공을 살린 과학 전문 기자를 진로에 염두를 두고 있을 만큼 제법 글 쓰는 일에 익숙해졌지만 그녀의 전공 분야에서 ‘일반적인’ 길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계속 맴돈다. “고대신문 한다고 하면 과 친구들은 ‘그런 걸 왜 해?’ 그래. 우리 과나 자연계열에선 이런 일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으니까.” 확실히 기사를 쓰는 일은 그녀에겐 낯선 일이다. 여전히 전공 분야를 계속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인생을 길게 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니까 일단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 싶었어. 어차피 기자가 되던 그냥 연구원을 하던 넓은 범위 안에서 생각해 보려고.”

아직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인생은 길고, 그녀는 최선을 찾아가기에 충분히 젊다. 긴 이야기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 앉은 박웅현 씨는 약간 지친 듯이 보였다. “고대신문 하는 친구들이면 스펙보단 자신만의 경험을 중요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불안해하는 것 같네.” 그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한다. 그래도 그 많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기자들을 보니 역시 청춘은 청춘인가 싶어 그는 웃는다.

지금 청춘이 흔들리는 이 계절은 이제 곧, 봄이 오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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