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스페인과의 인연은 망아지와 시인 사이의 우정을 노래한 산문시집으로 시작되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세비야의 물장수’에 매혹되어 미학을 전공하려고 했던 내가 그 시를 만났을 때, 시와 회화의 주인공이 모두 스페인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저 우연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당연히 이러한 예술가들을 탄생시킨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됐고, 그에 따른 갈급증으로 일찍부터 유학을 꿈꾸었지만 생면부지의 그 먼 곳으로 가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부모님의 말씀 때문에 학부를 졸업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국 스페인 정부 장학금과 마드리드 국립대학 입학 허가서를 보여 드리고 나서야 나는 스페인으로 향하는 22시간의 비행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당시는 러시아와 중국 하늘이 열리지 않아서 미국 앵커리지를 돌아가야 했는데, 그것도 한번으로 가는 게 없어서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에서 이민 보따리 같은 유학 짐을 찾아 40분 거리에 있는 오를리 공항으로 버스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두어 시간을 기다린 다음 다시 비행기에 올라 또 그만큼을 더 날아가야 했던 곳이 마드리드였다. 택시 기사에게 부탁하여 고른 시내 호텔 아파트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집을 구할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당시 스페인에는 국립대학교 수가 사립대학보다 약 6배 많은 44개 정도였으며 유럽의 국립대학 대부분이 그러하듯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만 되면 돈이 없어도, 직장이 있어도 누구나 대학에 다닐 수가 있었다. 국가 재정의 4.5퍼센트가 교육에 할당되어 있었기 때문에 등록금이 우리 돈으로 과목당 6만 원 정도였고, 야간 수업까지 있어서 내가 다닌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의 학생 수는 10만 명에 달했었다. 스페인 학생들은 말 그대로 수학능력 시험으로, 외국 학생의 경우에는 전 대학에서 수학한 과목에 대한 학점 인정으로 입학이 허락되었다. 마드리드 국립대학교는 특히 어문학 쪽에서 전통이 강하다. 

1년 1학기제로, 문학과목당 필독서가 40권 정도 되었으며, 문학 이론이나 비평 방법은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해결되어 있어야 할 상식이었다. 수업에서는 토론으로 작품을 분석했다. 시험은 이론과 실제로 나누어 3시간 이상 보았는데, 필독서로 내준 책들 중에서 두 작품을 교수가 선택하여 텍스트를 주면, 어떤 작품의 어느 부분이라는 것부터 시작하여 내용을 평해 놓아야 했다. 일주일 뒤면 성적표가 강의실 입구에 붙었다. 어학에서는 영어는 교양 필수였고 스페인어의 모어인 라틴어가 2년 동안 이수해야 할 전공 필수였다. 그리고 스페인 문화를 이루는 데 일조한 민족들의 언어인 히브리어, 헬라어, 아랍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역시 2년 동안 필수로 이수해야 했다. 4, 5학년에 들어가면 스페인 자치지역 언어인 가예고(갈리시아)와 까딸란(까딸루냐)도 필수였다. 언어 습득과 아울러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 목표였다. 약 70명이 수강한 1학년 중세문학 수업에서 시인이 11명이나 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도 있다. 스페인 노천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쪽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데, 죄다 시인들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무엇이든 대화의 주제로 삼을 수 있으며, 가끔은 인용문까지 다는 문학 토론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문학이 삶에 녹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유학 시절을 회고하고 있자니 요즘 대세인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글이 떠오르면서 이런 의문이 든다. 정말 청춘은 아파야 하는 것일까. 아픈 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잣대로, 또 사회의 통념 속에서만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은 아닐까. 타자의 기준이 우리들의 위대한 어머니가 되어 버려서 우리의 꿈과 이상이 그 존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시도할 때 두려움이나 망설임은 사라진다. 그러니 아플 시간도 없을 것이다. 유학 시절 라틴어 담당 교수로부터 호출당해 받았던 혹독한 질책에도 난 무너질 수 없었다. 힘들었지만 젊었기에 회복력도 컸다. 청춘이 아픈 건 일단 가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안영옥 문과대 교수 서어서문학과
안영옥 문과대 교수 서어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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