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과학의 시대다. 의학과 공학이 합쳐지기도 하고 분자 수준의 나노 기술이 IT에 접목하기도 한다. 허나 과학기술간의 융합이 대다수였다. 여기 언뜻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학과 과학, 그중에서도 뇌과학과의 융합을 시도한 교수가 있다. 바로 석영중(문과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다. 석 교수는 ‘융합’보다는 ‘상호조명’이란 말을 썼다. 말 그대로 서로에게 빛을 비추어준다는 의미다. 교수에게 문학과 뇌과학의 ‘상호조명’에 대해 들었다.  

▲ 석영중 교수가 문학과 뇌 과학의 상호조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강홍순 기자 nada@)

- 어떻게 연구를 시작하게 됐나
“문학도 뇌도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므로 양자가 서로 불충분한 부분을 보충한다면 인간에 대한 앎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순수 문학을 전공한 학자가 뇌를 공부한 뒤 양자를 접목시켜 쓴 책은 내가 아는 한 해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뇌과학자의 시각에서 문학을 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 뇌과학을 기웃거린 것도 아니다. 뇌와 문학 연구 간의 접점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새로운 연구영역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 싶었다”

- 문학과 과학의 융합이 필요한 이유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 과학적 자료에서 도출되는 인문학적 결론, 객관적 사실과 직관적 진실의 조화, 이런 것들이 인간 탐구에 기여할 여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학 연구와 뇌 연구는 인간 본성의 탐구라고 하는 동일한 궁극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뇌 과학자가 읽는 인간과 문학연구자가 읽는 인간 사이에는 분명 중첩되는 지점이 있다. 뇌 과학의 발견과 수 천년 동안 누적된 문학 속의 해석은 서로를 비춰주는 가운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인간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 두 학문의 융합 연구가 생소하게 들리는데
“문학과 과학의 융합연구는 사실상 아직까지 뚜렷한 모델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가장 이상적인 것은 문학과 과학 두 가지 모두를 다 꿰뚫고 있는 연구자가 선도적으로 양자의 융합을 이끌어나가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런 연구자가 있기는 하지만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사실상 한 가지만 잘하는 것도 벅찬 일 아닌가. 결국 인문학자와 과학자가 소통하는 가운데 융합 연구를 진행하는 길 밖에 없다. 이 경우 가장 큰 장애는 역시 닫힌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학에 대한 인문학자들의 경직된 마음, 인문학에 대한 과학자들의 경직된 마음, 그런 것 말이다. 나 또한 인문학자로서 과학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일정 정도 편견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인문학자와 과학자가 상대편 학문에 마음을 열어야만 양자 간의 융합을 밀도 있게 모색할 수 있다”

- 외국의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외국에서도 문학과 신경과학을 접목시킨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다. 그래도 대략 세 가지 방향의 연구가 진행 중이라 할 수 있다. 

첫째, 문학 창작과 문학의 수용을 뇌의 작용이란 맥락에서 연구하는 경향이다. 이런 방법론의 선구자는 플로리다 대학 명예교수인 노먼 홀랜드(Norman Holland) 교수다. 그는 <문학과 뇌>를 비롯한 여러 저술에서 문학작품의 창작과 수용에 관한 뇌의 작동 상황을 이론적으로 탐구했다. 홀랜드 교수는 영문학, 정신분석학, 인지심리학을 넘나드는 연구자로 상당 기간 동안 문학과 뇌의 융합연구에 매진해왔다.

둘째, ‘신경문학비평’이 있다. 이것은 신경학적 리서치와 인지과학을 통해 문학을 설명하고 분석한다. 저명한 러시아 문학 연구자도 여기 참여하고 있는데, 신경문학 비평가들은 인간이 복잡한 문학작품을 읽을 때, 혹은 문학을 창작할 때 그의 뇌에서 어떤 뉴런이 어떻게 발화하는가를 뇌스캔을 통해 관찰함으로써 창작과 독서 이면에 있는 생리학적 과정을 규명한다. 이런 시도는 기존의 문학 연구 방법론과 너무도 달라 많은 연구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 의견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만만치 않게 제기됐다. 문학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런 방법을 고도로 정신적인 창작 활동과 독서 활동에 대한 일종의 모독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그 다음으로는 특정 작가와 작품을 뇌과학과 연결시켜 바라보는 연구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찾을 수 있던 책은 조나 레러라는 신경과학 전공 칼럼니스트가 쓴 <프루스트는 뇌과학자였다>와 신경과학자와 영문학자가 공동집필한 <셰익스피어, 뇌를 말하다>이다. 이 저술들은 특정 작품과 뇌과학을 직접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참신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문학과 신경과학 간의 융합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특정 작품을 신경과학적으로 읽기라는 점이 훨씬 많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프루스트나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이런 식의 접근법에 대해 불편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 책들을 읽으면서 부분적으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 두 학문의 융합연구에 대한 미래 전망은
“앞에서 언급한 경향들은 아직은 하나의 시도에 불과하며 여기 관여하는 학자들 역시 극소수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방법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미래의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테마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나아가야할 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뇌과학과 문학연구의 융합 모델은 인문학자가 넘을 수 없는 한계, 과학자가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한다는 합의아래 양자의 결합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사용할 방법을 강구해야한다. 또한 아주 다른 영역 간의 융합이기에 양자가 상대방의 학문적 특성을 존중해야 한다. 최첨단 과학적 발견에 인문학적인 깊은 이해가 더해진다면 분명  인간탐구의 영역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다”

>>> 과학적 시각으로 문학작품을 분석한 표

문학작품

관련 과학 지식

상호 조명 해석

그녀의 영혼은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그리고 기다림은 끝났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말했다, 바로 저 사람이야!

.

.

.

공상의 행복한 힘으로

다시 살아난 허구의 인물들,

쥘리 볼마르의 연인,

말렉 아델과 드 리나르,

격정의 순교자 베르테르,

우리를 꿈길로 안내하는

저 독특한 그랜디슨

이 모든 인물들은 꿈 많고 어여쁜 소녀에게

하나의 형상으로 나타나 오네긴 속에서 합쳐졌다.

좋아하는 작가의 여주인공들,

클라리사, 쥘리, 델핀이

된 듯 상상하며

타티야나는 위험한 책을 손에 든 채

홀로 적막한 숲 속을 헤맨다.

책 속에서 희구하고 찾아낸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열정을, 꿈을,

충만된 감정의 결실을,

 

 

 

푸슈킨 <예브게니 오네긴>

 

 

 

1990년대 초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의 신경과학자 자코모 리촐라티의 연구 팀이 마카크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손 운동을 담당하는 뇌의 전운동피질의 신경과학적 메커니즘을 규명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이 때 원숭이가 다른 사람이 손으로 무언가를 집으려는 것만 봐도 전운동피질이 반응한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즉 다른 동물의 행동을 거울처럼 반영해 자신이 행동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쥘리, 아델, 리나르, 베르테르 등은 그 당시 러시아에서 인기 있던 유럽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여자 주인공 타티야나는 독서를 좋아하는데 소녀 시절에는 낭만 소설을 많이 읽는다. 수백 권의 연애 소설을 읽는 동안 그녀의 뇌 속에서는 거울 뉴런이 반응해 마치 실제 수천, 수만 번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듯이 반응한다.

그리고 그녀 앞에 오네긴이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이 읽은 소설책 코드에 맞춰 오네긴을 재창조한다. 그녀 앞에 나타난 오네긴이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들의 모든 특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과자 건더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했다.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불현 듯 어디선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휘감았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도 같은 방식으로 소중한 어떤 정수 같은 것으로 나를 채웠다. 그것은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인생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끔 하였다. 아니, 차라리 그 정수 같은 어떤 것은 내 몸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죽은 후, 사물이 없어진 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냄새와 맛만은 홀로 옛 과거로부터 살아남아 아주 미미하지만 그런 만큼 보다 뿌리 깊게, 형태는 없지만 집요하게, 충실하게, 오래오래 변함없이 넋처럼 남아 있어 추억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다른 온갖 것의 폐허 위에서 환기시킨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감각(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은 기억을 유발시킬 수 있지만 기억을 유발시키는 정도는 모두 다르다. 오감 중 특히 미각과 후각은 기억에 강한 촉매제 역할을 하는 감각이다.

이는 후각과 미각만이 뇌의 장기 기억 센터인 해마에 직접 연결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후각과 미각 섬유들은 해마와 편도체에 직접 시냅스로 연결되지만 시각 등은 몇 차례의 중간 연결을 거쳐 연결된다.

프루스트는 마들렌의 맛과 냄새로 과거를 환기한다. 그는 직관적으로 후각과 미각이 가장 오래 기억되는 감각임을 알았다. 해마에 새겨진 후각과 미각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참고자료 : 석영중, <뇌를 훔친 소설가>
                조나 레러,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리차드 레스탁, <나의 뇌 뇌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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