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회담, 포츠담 선언, 모스크바 3상 회의…

이 낯선 이국의 지명들과 함께 그 회담들의 주요 의제들을 짝지우기하며 국사(하)의 마지막 암기를 갈무리하던 고교시절의 기억이 다시 새롭다.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던  ‘6자회담’ 탓이다. 저마다의 조바심, 증오 혹은 불신과 기대에 따라 얽히고 설킨 6개국의 이 前代未聞, 五里霧中의 만남이 훗날의 아이들에게도 그저 국사 과목의 단순 암기 사항으로 轉落(그러면 다행이고)될 수 있을런지….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투닥투닥 개싸움에도 샛된 보이 소프라노의 “넌, 임마 빠져!”라는 結者解之 원칙이 종종 선언되는 걸 본다. 어른 싸움은 그게 안되는 모양이다. “제발 좀 나를 보고 얘기해, 어딜 봐! 너랑 얘기하고 싶다니깐” 북한이 당사자 해결 원칙을 주장하며 아무리 애원하고 으름장을 부려봐도 미국은 요지부동이다. 좌판을 크고 복잡하게, 되도록이면 위태롭게 늘어놓아야 세계 평화가 온다 이거다. 베트남에서처럼, 이라크에서처럼, 아프카니스탄에서처럼.

한반도의 핵문제는 그것이 ‘핵’의 문제라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문제라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미국의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므로 그것은 도리없이 우리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지난 94년 전쟁위기서부터 지금까지도 생경한 느낌이 여전한 ‘농축우라늄’, ‘고준위 폐기물’, ‘플루토늄’ 등등의 용어들이 다시 횡행하는 이때, 북한 핵문제 진척 과정을 난 이렇게 정리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작금의 한반도 남쪽 사람들의 무관심의 패턴을 설명할 수 있으랴. 내가 골똘해하지 않는, 남이 네 궁리거리라고 던져주는 문제의 답은 찰나의 ‘불안’이 되었다가, 당분간은 견딜만한 ‘현실’로 되었다가, 파국에는 운명으로 감내해야 하는 ‘전쟁’일지 모른다. 무섭다. 나만 무서운가?    
 

‘불안’과 ‘고통’의 차이를 장황하게 토로하던 어느 소설의 한 대목을 기억해 본다. ‘고통’은 그것이 영혼에 아로새긴 흉터가 아무는 동안 사람을 성숙하게 하지만 ‘불안’은 사람의 마음을 좀먹어 들어가고 결국 영혼을 황폐하게 한다는 대목. 그 유사어들의 뉘앙스 설명 앞에서 짐짓 마음을 다잡았던 적이 있었다. 고통은 확실한 현재의 운명이요, 처지. 불안은 불확실한 미래의 걱정이요, 근심. 그래서 고통은 이겨내든지 아님 무릎 꿇든지 兩者擇一이 결말이지만 불안은 본질이 헛것이구나, 했던 적이 있었다.

 북핵 문제에 무관심한 한반도 남쪽 사람들의 심정 밑바닥에는 미국과 북한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는 ‘불안’이 채 녹지 못한 어떤 가루 마냥 가라앉아 있다. 6자 회담을 곱씹고 다음 회담 채비를 하면서 컵의 밑바닥을 좀 저어보자. 저어서 마셔봐야 그게 설탕물인지 소금물인지 알거 아닌가? 불안을 저어서 고통을 음미하자. 그래야 답이 보인다.

 (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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