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관 문과대 교수·일어일문학과
일본사람이 무서워하는 것은 첫째가 지진, 둘째가 화재다. 그만큼 지진이 많은 나라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만 하던 지진이 공포로 다가온 것은 일본생활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새벽에 집 전체가 크게 흔들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것이 바로 지진이었다. 조립식 서가를 벽에 나사로 고정시켜 두질 않았더라면 잠자는 내 위로 넘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학교에 가보았더니 난리가 아니었다. 도서관 서가가 거의 넘어져 있었다. 어느 분야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 거의 욀 정도가 되었는데, 이 기회에 전면적으로 서고 배치를 다시 한다는 말에 할 말을 잊었다.

내가 유학한 동경대학은 혼고(本鄕)캠퍼스와 교양학부가 중심이 된 고마바(駒場)캠퍼스로 나누어져 있는데, 나는 고마바의 총합문화연구과(종합문화대학원에 해당) 비교문학비교문화전공에 소속되어 있었다. 패전 후 혼고의 국문학자들과 입장을 달리하다가 떨어져나온 학과였다. 고마바 비교문학전공은 미국, 프랑스와 더불어 비교문학을 지탱하는 세계 3대 학파의 하나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에 걸맞은 저명한 교수진이 포진해있었다. 이론중심의 미국과 달리, 텍스트의 원전 해석을 중시하며 자서전 기행문 등으로까지 문학연구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혼고의 국문학(현재는 일본문화연구전공으로 명칭 변경)이 정통적인 방법을 고수해온 권위가 있다면, 이에 비해 고마바 비교문학은 비교적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국문학자와 비교문학자들이 때로는 심한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서로를 의식하며 일본내 문학 연구의 양축을 이루며 발전해온 점이 부럽기도 했다. 근자에 우리나라에서는 영어권의 저널만을 인정하는 경향이 강한데, 일본에서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는 A&HCI나 SCI와 같은 저널이 없으며 오히려 전문학회지가 더 큰 권위를 갖고 독자의 학문발달을 이루어 온 점은 평가할 만하였다. 

당시 비교문학전공에서 주된 연구 경향은 근대일본이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서구 문화를 어떻게 수용, 소화, 혹은 발신했는가였는데, 그에 따라 일본중심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교수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한 번도 본인의 사상을 강요한 적이 없었지만, 근세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어떻게 문예화해 갔는가를 규명하는 논문을 쓰는 나로서는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논문심사 때 당시 병원에 입원 중이던 우익 교수 한 분이 일부러 심사하러 나와서 ‘너와는 사상적으로는 다르지만 학문적으로는 인정한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일본의 또 다른 저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도교수는 혼고 국문과 출신으로 학문에만 빠져 사는 장인과 같은 분이었다. 덕분에 일본 국문학의 정통방법론과 비교문학을 모두 익힐 수 있었고 내 나름의 방법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 후 생각지도 않게 석사논문이 유명출판사에서 간행되고 학술상 후보로 거론되는 등 유학생으로는 남다른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밤마다 원고와 싸움하며 지새우는 날의 연속이었다. 매일 연구서를 읽으며 400자 원고지 4장 이상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다 보니 아침 해가 떠야 눈을 붙이는 야행성 체질로 변해버렸다.

논문은 발로 쓰는 것이라는 신념 하나로, 동경대와 와세다대 도서관, 내각문고 등의 문지방을 부지런히 넘나들었고, 지방 도서관에는 자료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매일을 바삐 살다 보니 사비 유학생임에도 아르바이트보다는 장학금을 받을 궁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연례행사처럼 각종 장학재단에 논문과 연구계획서를 잘 써서 신청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행히 매년 장학금이 끊이지 않았고, 그 덕에 최단기로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참 운이 좋은 편이었다. 글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아내와 집 근처의 에도가와(江戶川) 강변을 걸으며 별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때의 추억이 지금도 남아서 주례사를 할 때면 늘 ‘하늘의 별을 같이 보는 부부가 되세요’라고 말하곤 하는데,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순수하고 행복한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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