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추억하게 하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감성은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라는 노래와 함께 이어집니다. 첫사랑과 잘 어울리는 이 노래와 같은 앨범에 수록된 ‘취중진담’은 술에 취해 ‘촌스럽고 못미더워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사랑 고백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술의 힘을 빌려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 놓는 것은 어쩌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여기 학우 한 명의 첫사랑에 관한 취중진담이 있습니다. 익명을 요구했기에 그의 칵테일 이름을 따 그를 ‘블루 사파이어’라고 소개합니다.

기자는 블루 사파이어 씨가 칵테일 잔을 내려놓자마자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대로 답하기를 바라며. “첫사랑을 어떻게 만났나요?” 하지만 그의 대답은 꽤 차분했다.

“새터에서 같은 새내기로 만나게 됐어요. 새터 첫날, 술에 취한 한 친구가 제게 고백을 하더라구요. 당시에는 황당하기도 하고 뜻밖이라 저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입학 후에 같이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고, 3월 중순에 다시 고백을 받았습니다. 그 때는 저도 그녀가 좋아서 연애를 시작했지만, 남들 몰래 사귀어야 했어요.”

“왜요? 같은 과면 더 알려지기 쉽지 않나요?”

“사실 그녀가 이미 공식 CC였거든요. 새터 둘째 날 다른 선배가 그녀에게 고백을 했고, 제가 두 번째 고백을 받았을 때 그녀는 벌써 그 선배의 여자친구였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첫 고백 때 저의 미지근한 반응과 선배라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었다고 하더군요.”

어느덧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한 기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건 양다리잖아요!”

“그때 저도 화가 나긴 했지만, 한 여자와 연애부터 결혼까지 하자는 저의 연애관 때문에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어요. 1학기가 끝나자마자 선배가 군대를 가면서 둘은 헤어졌고, 저는 그녀와 공식 커플이 됐죠.”

“첫사랑을 위해 난 이런 일까지 해 봤다, 있나요?”“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사랑했기 때문에 첫사랑은 그 자체로 제겐 의미가 큽니다. 처음 해보는 연애였기 때문에 아는 게 없어서 친구들에게 상담도 많이 했어요. <건축학개론>의 이제훈이 그랬던 것처럼요. 연애 지침서, 남녀 심리학 서적도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기자는 사랑을 위한 그의 다양한 노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여워서 쿡 웃어 버렸다.

“연애를 글로 배우신 거네요?”

“네. 실전에 적용도 해봤습니다. 여자친구가 통학을 했었는데 동아리 활동으로 늦을 때면 항상 집까지 데려다 줬어요. 그 근처 찜질방에 가서 씻고 쪽잠을 자다가 아침 6시에 첫차를 타고 등교하는 생활을 한동안 했었죠.”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으세요?”

“지금은 절대 못 하죠. 첫사랑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무모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고가의 선물도 그녀에겐 아깝지 않았고, 기타 치는 남자가 좋다는 말에 곧바로 학원에 등록하고 인터넷도 찾아가며 연습을 한 끝에 멋진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어요. 그녀와 5년 가까이 사귀었는데, 사귈수록 더 좋았고 항상 설렜어요. 잘 보이고 싶어서 언제나 제일 멋진 모습으로 약속에 나갔죠. 데이트 때 청바지를 입지도 않고, 눈이 굉장히 나쁜데도 안경을 쓴 적도 없었어요.” 첫사랑의 기억을 회상하는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본 기자는 그가 아직도 첫사랑의 기억에 사로잡혀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재빨리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혹시 첫사랑을 아직도 잊지 못하시는 건가요?”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남자가 첫사랑을 잊게 되는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세요? 남자는 결혼을 하고 자신의 첫 아이를 품에 안을 때 비로소 첫사랑을 ‘묻어’ 둘 수 있다고 해요. 평생 절대로 잊지 못한다는 거죠. 저도 아마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꽤 긴 시간동안 함께였고 캠퍼스를 비롯해 같이 다닌 모든 곳에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이 묻어있거든요.”

“대학생활의 대부분을 함께하신 건데, 첫사랑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제 성격이 많이 변했죠. 저는 원래 굉장히 이기적이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저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녀를 만나고 많이 바뀌었어요. 남을 배려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됐죠. 동성 친구들보다 훨씬 더 가깝게 지냈던 여자친구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들이에요.”

“그렇군요. 하지만 헤어지고도 긍정적인 감정이 남아있나요?”

“사실, 헤어질 땐 많이 아팠어요. 그녀의 일방적인 이별통보는 정말 힘들었죠. 하지만 상처가 깊었던 만큼 더 배우고 남는 거라 믿어요. 비록 그녀와 헤어졌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결국 지금의 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헤어진 연인을 자꾸만 감싸려는 그의 모습에 심술이 난 기자는 짓궂은 질문을 시작했다.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있지 않을까요?”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해질까 봐 동아리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결국 당시 동아리를 함께 했던 친구들을 다 잃었죠. 사실 전 하고 싶은 게 굉장히 많았었는데 다 포기했어요. 사랑을 해야 했으니까요.”

“이별 후유증은 없으셨나요?”

“술에 잔뜩 취한 채로 그녀가 사는 기숙사 앞에서 18시간을 멍하니 서 있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자신을 돌보며 사랑을 했어야 했던 것 같기도 해요.”

잠깐의 정적 후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첫사랑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요?”

“저의 모든 것을 던졌던 가장 위험한 감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감정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대답은 기자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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