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학 문과대 교수·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는 로마, 게르만, 이슬람 문화 등이 융합되어 형성된 스페인의 토대 위에 잉카, 마야, 아스테카 등의 원주민 문화가 혼종되어 생성된 다원주의적 사회이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조(mestizo-백인과 인디오의 혼혈)는 1492년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인종으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인종혼혈이 최단 시간 내에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이다. 따라서 스페인 및 아스테카, 잉카 등의 역사를 고찰해야만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융합과 부정- 스페인의 자기파괴]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그리스, 켈트, 카르타고 등의 침입을 받았던 이베리아 반도(그리스어 Iberia)는 2세기에 걸친 로마와의 투쟁 끝에 기원전 38년에 로마제국의 속주(라틴어 Hispania > España)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오랫동안 유지되던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과 수에보족 등의 침입으로 인하여 무너졌다. 기원후 429년에 성립된 서고트 왕국은 서기 711년에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 해방노예 출신인 타릭(‘Tarik의 눈’에서 Gibraltar 지명 유래)이 이끌고 온 이슬람 군대에 의하여 붕괴되었다. 이후 기독교도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쪽으로 도피하여 아스투리아스, 레온, 팜플로나, 까딸루냐 등의 기독교 왕국들을 세운 후 남쪽의 이슬람 왕국에 대항하여 국토회복전쟁(la Reconquista)을 시작하였다.

700여년에 걸친 이교도와의 투쟁 기간 동안 북쪽의 기독교 왕국들과 남쪽에 형성된 이슬람 왕국들은 항상 적대적 관계만을 유지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따라 합종연횡하며 공존하는 모순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디아스포라 이후 이베리아 반도로 흘러 들어온 유대인들은 이슬람과 기독교 왕국 모두에서 종교적 자유를 보장 받으며 금융업자, 상인, 왕실의 재정담당 관리, 외교관 등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이 겉으로는 종교전쟁을 벌였지만, 안으로는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의 세 유일신 종교가 공존하는 과정 속에서 스페인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기독교 왕국들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와 까스띠야 왕국의 이사벨이 혼인하여 하나로 통일되게 되며, 이들 가톨릭 양왕(los Reyes Católicos)이 1492년 1월에 이슬람 최후의 보루였던 그라나다 왕국을 점령함으로써 국토회복전쟁은 막을 내린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스페인은 또 다른 ‘레콩키스타’를 실현할 기회를 갖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가톨릭 양왕은 스페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부였던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을 추방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금융업과 상공업을 장악하고 있던 ‘태동하는 자본가 계급’이었던 유대인들을 추방하면서 이후 스페인에서는 부르조아 계급이 성장하지 못하게 되며, 그 결과 자본축적이 불가능하게 되어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 또한 이슬람교도들을 추방해 이들에게 상가 또는 주택을 임대해 주던 하급귀족이 몰락, 중산층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이러한 스페인의 자기파괴 성향은 라틴아메리카의 정복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인디오 문명의 철저한 파괴와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명의 창조가 동시에 구현된다. 즉 타자와의 투쟁, 포용, 혼합, 인지 및 부정이라는 正反合의 연속이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특이성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이냐 불관용이냐, 피의 순수성이냐 혼혈이냐, 중세도시의 민주적 전통이냐 전제적 권력이냐, 전통이냐 변화냐 등의 문제는 스페인에 의해 정복된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똑같은 딜레마로 작용하여 이후 이 지역이 이분되고 투쟁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처럼 많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었음에도 16세기의 스페인은 독일, 네덜란드, 시칠리아 섬, 사르디니아 섬, 북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필리핀, 괌, 사이판 등을 지배하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형성하였다. 동시에 세속적 권력에 기독교적 이상을 접목시키려는 이상 속에서 내부로부터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재학 문과대 교수·서어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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