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들이 버팔로를 어떻게 잡았는지 아느냐? 버팔로 떼를 벼랑 끝 한쪽으로 몰아서 앞선 녀석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도 멈출 수 없게 만들어서 버팔로를 잡았단다’. 97년 졸업을 앞두고 군대도 대학원 진학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이던 한 공대생의 인생을 크게 바꾼 결정적인 말이었다. 사실 수업은 꽤 지루했었고, 그 과목에 나도 큰 소질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고서야 배운 당구는 어느덧 200에 가까워졌고, 학점은 겨우 3점을 넘을 정도의 평범한 스펙을 가진 필자였지만, 수업 중에 들은 이 한마디로 부터 나는 무작정 남들이 가는 길만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막연한 목적의식이 생겼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결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단순히 외국에서 살아보고도 싶다는 생각도 곧 더해졌다.

그렇게 허술하게 결정된 나의 유학 계획은 이 후 철저하게 준비되었다. 유학을 가기위해 학부 졸업 후에 산업기능요원으로 군복무를 마친 것부터, 당시 국내에 존재하던 가능한 모든 유학 장학금 프로그램(당시에는 총 5종류의 유학 장학금이 있었다)에 응시한 것이며(결국 3곳에서 선정되고 최종 1곳의 지원을 받았다), 유학 중에 연구조교라도 할 요랑으로 본교 대학원에 비등록 연구생으로 1년여 대학원생처럼 살았던 일들이 그렇다. 대체복무 기간을 합쳐 4년여를 어렵사리 준비하여 입학한 곳은 미국 남부 텍사스의 칼리지 스테이션(College Station)이라는 자그마한 도시에 위치한 텍사스A&M 대학교(우리말로 ‘덕주농공대’로 변역될 수 있다) 이었다. 혹자들은 A&M 이라는 단어가 농학&광산학에서 출발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농학&기계공학이 맞는 말이다. 1876년 설립된 이 대학은 당시의 최첨단 학문인 농학과 기계공학 중심의 군사학교로 운영되었고, 관련분야에 많은 명성을 얻어왔다. 이 후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고 여러 학문분야에서 발전하였지만, 동문들의 결사반대로 학교명에서 A&M이라는 단어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대학원으로 진학할 학교를 이 학교로 삼은 이유는 사실 요즘 우리사회의 이슈 중의 하나인 등록금 때문이었다. 진학할 학교를 결정할 당시(나에게는 미국 6개 대학의 입학허가서가 있었다) 20세기 후반 전자산업의 시발점이나 다름없는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IC)를 개발한 Jack Kilby라는 분이 내가 진학할 학과에 교수로 재직했다는 사실이나, 미국 내에서 캠퍼스의 크기가 제일 큰 대학이라는 사실, 진학당시 고대동문이 100여 명이나 공부하고 있었다는 사실(덕분에 서른이 넘어서 입학한 미국학교에서 사발식도 했었다) 등은 전혀 알지 못했고, 오직 학비 대 대학평가순위로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어 저비용, 고품질 교육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했다. 지금와서 돌이켜봐도 당시 한국의 사립대 학비와 엇비슷할 정도의 저렴한(?) 학비라는 점이 아니었으면 40도를 넘나드는 여름이 일년의 반인 텍사스로 유학을 떠나진 않았을 것 같다.

문화적 다양성과 언어의 장벽에 고전하던 초기 유학생활은 지도교수를 정하고서야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나의 지도교수는 당시 갓 부임한 Mosong Cheng이라는 중국인 이었는데, 그 분 연구실에는 당시 북경대와 칭화대를 졸업하고 진학한 중국 출신 학생 2명이 이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중국과기대를 3년에 졸업하고 UC Berkeley에서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은 지도교수까지 졸지에 3명의 중국 천재그룹에 섞이게 된 나는 당황스러웠고(?), 여간해선 존재감을 보여주기 힘들었다. 랩미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중국 친구들이 자유롭게 사용하던 기초적인 연구용 소프트웨어인 Matlab 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였다(불행스럽게도 나는 학부시절 이런 툴을 배우질 못했지만, 다행히 우리학과에서는 현재 이 툴을 가르치고 있다). 지도교수님이 무척 인자로운 분이셔서 나를 해고하거나 심한 심리적 압박을 가하진 않으셨지만, 그런 부드러운 교수님 뒤에서 나에게는 중국인 친구들에게 지지 말아야겠다는 강력한 高大 유래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고, 학위과정 내내 스스로 활활 타오르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스스로의 동기부여(Self-Motivated)는 나를 거의 매일 자정 가까이가 되어서 쓰러질 지경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는 ‘돌쇠연구원’으로 만들었고(유학시절 한국 친구들끼리 머리가 뛰어나진 않지만 어떤 과제든 시켜만 주면 지구탈출의 노력을 해서 결국은 해내고야 마는 육체파 연구원들을 이렇게 칭했다), 결국 지도교수님의 연구비가 부족해서 중국인 친구들을 해고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학업과 연구를 마칠 수 있었고, 4년 반이라는 비교적 단기간에 석사학위를 생략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 후 나는 서부의 한 주립대학(UCLA)에서 ‘박사 후 돌쇠연구원’ 생활을 1년 반 더 거쳤고, 현재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전자및정보공학과에서 나노바이오포토닉스연구실을 이끌어가고 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내가 하고 싶은 시간에 할 수 있고, 내가 겪은 시행착오와 내가 아는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며, 가르치면서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직업을 가지게 되어서 행운이라 생각한다. 고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 후 연구원을 거쳐 고대로 다시 돌아온 과정을 찬찬히 되돌아보면 여러 가지 행운도 많이 따랐지만, 그 행운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다. 행운을 받을 만큼 준비된 돌쇠들에게 다 돌아가고 난 다음에야 나에게 돌아왔다.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라는 진부한 격언과 다를 것이 없지만, 머리가 비상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기에 앞으로 10년, 20년 더 ‘돌쇠교수’ 생활을 거치면 또 어떤 행운이 찾아올지 무척 궁금해진다.

서성규 과기대 교수·전자및정보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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