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게이로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추천할 일은 아니다. 성소수자에 대해 개방적인 나라를 제외하고 상황은 물론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유교문화가 자리 잡고 있으며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기독교의 영향이 큰 한국 같은 경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살기가 더 험난하다. 한국 사회에선 ‘남자는 어때야한다’ 혹은 ‘여자는 어때야한다’라는 성(性)에 따른 역할이 분명히 나뉘어져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따라야한다고 사회적으로 학습 받는다. 여기에 지나칠 정도로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한국인의 특성도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한 몫을 한다.

성소수자들은 모두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개인적, 사회적 벽을 넘어야한다. 개인적인 벽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라면 후자는 사회와 자신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사춘기 혹은 성인이 돼서도 겪는 정체성 혼란도 큰 어려움이지만 사회적 벽은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공고하다. 아직까진 아무리 개방적인 사람일지라도 동성애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해를 한다고 겉으로 말하더라도 주변인에 이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상상은 하지 않는다. 수 십 년간 알고 지낸 막역한 친구, 명절 때마다 얼굴을 마주치는 친척, 같은 집에서 사는 가족은 동성애자가 절대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이렇게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동성애자들의 사회적 벽 중 하나이자 가장 큰 고통이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 사회에서도 성소수자는 존재해 왔다. 혹자는 현대 사회에선 동성애 소재의 영화, 만화, 소설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사회적 벽이 많이 허물어졌다고 하기도 한다. 나 역시 사회가 보다 개방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한낱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미디어를 통해 얻은 것은 우리의 존재를 사회가 ‘인식’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동성애자와 사회 사이에 놓인 담을 허물기보다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철창을 세운다는 느낌을 받는 건 왜일까.

동성애를 잘 안다고 해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물원 원숭이 마냥 철창너머 구경의 대상으로만 치부할 여지가 있다. 성소수자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필요하다고 원론적으로 답변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 합의라는 전제가 동성애를 충분히 ‘아는 것’인지 ‘이해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누가 규정하는가. 의미 없는 논쟁과 씨름을 하며 사회적 담론, 사회적 인식 변화를 이야기하는 동안 수많은 성소수자 자신의 정체성을 이유로 고통 받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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