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의 스페인은 국토회복전쟁(la Reconquista) 기간 동안 양산된 귀족들의 무장해제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당시 까스띠야(Castilla) 왕국의 귀족층은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하여 그 비율이 1% 내외에 불과한 다른 유럽 국가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들의 국외송출이 이루어졌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이교도와의 투쟁을 통하여 내재된 이들의 호전적 성격은 라틴아메리카의 정복과정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 무자비한 살상과 파괴가 자행되었다. 정복자(el Conquistador)들의 행위는 국토회복전쟁의 연장선에서 정당화 되었으며, 인디오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당시 출간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르네상스의 분위기와 맞물리며, 특권이나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정복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이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El Dorado), 여인들의 국가 아마존(Amazona) 등에 대한 이야기는 신대륙에 대한 정복욕을 고취시켰으며, 아스테카와 잉카 제국 등이 정복되면서 현실과 환상이 어우러지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아스테카(Azteca) 제국의 정복- 숙명론 對 자유의지]
에르난 꼬르떼스(Hernán Cortés)는 대표적인 르네상스형 인간(Renaissance Man)으로서 불과 500여 명의 군인을 데리고 중앙 멕시코 고원에 위치한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하였다. 꼬르떼스는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인구 수천만의 대제국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는 부하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타고 온 배를 불태워 버린 후 인간의 의지로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 무렵의 아스테카 제국은 동쪽으로 떠난 하얀 얼굴의 신 켓살코아틀(Quetzalcoatl)이 자신들을 지배하려 '제1 갈대의 해(1 Acatl)'에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설에서 예언된 시기가 가까워오자 실제로 이상한 자연현상들이 잇따라 일어났으며, 공포에 질린 아스테카의 목테수마(Moctezuma) 황제는 종말의 시기가 가까워 옴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스스로 국가의 통치를 포기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꼬르떼스가 멕시코만에 상륙한 시기는 하얀 얼굴의 신이 도착한다고 예언한 시기와 일치하는 1519년의 봄이었다. 따라서 스스로 싸울 의지를 포기하고 숙명론에 빠진 목테수마의 제국은 아스테카의 통치에 반발하는 다른 인디오 부족들과 연합한 스페인 군대에 의해 결국 정복당하고 만다.

[인디오 세계의 패인과 정복의 결과]
왕위계승문제로 내분에 빠져 있던 잉카 제국 역시 불과 200여 명의 군사를 이끄는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ízarro)에 의해 정복당하고 만다. 이처럼 수천만의 인구를 가진 제국들이 소수의 스페인 군대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의 멸망을 믿는 숙명론  뿐만이 아니라(잉카의 황제 우아이나 카팍 역시 수염을 기른 하얀 얼굴의 인간들이 바다를 건너와 자신들의 세계를 파괴시킬 것을 죽기 전 예언하였다), 다른 문명과의 접촉이 전혀 없는 고립된 사회를 구축한 결과 외부세계로부터의 충격에 매우 취약한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잉카는 문자와 바퀴를 모르는 석기 문명권이었으며, 아스테카와 마야는 신에게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바치는 인신공양이 성행하던 청동기 문명권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의 발달된 무기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으며, 유럽에서 건너 온 천연두 등의 바이러스에 대항할 면역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수많은 인디오들이 천연두 등에 걸려 속수무책으로 죽어 갔으며, 잉카의 황제가 스페인 군대에 맞서 싸울 건강한 젊은이들이 남아 있지 않다고 탄식할 만큼 스페인에 맞서 싸울 전사들의 수가 급감하였다. 실제로 라틴아메리카 정복 후 한 세기가 채 지나기 전에 인디오의 인구는 강제노동과 전염병 등의 이유로 1/10 이하로 줄어들었으며,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흑인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정복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를 기반으로 국왕의 개입이 불가능한 지방 생활권을 형성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신의 대농장 안에서 휘둘렀다. 정복자(또는 대지주)들의 권력축소와 왕권강화를 위해 스페인 국왕들은 인디오의 인권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즉 인디오들에 대한 강제노동 금지 등의 법령을 제정하여 구조적으로 이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대지주들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스페인 국왕들의 인디오 인권보호는 실질적으로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왕권강화를 위해 내세운 명분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 교회는 정복초기부터 세속 정치에 간여하는 전통을 갖게 되었다. 즉 1508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신대륙에서의 교회 설립운영권과 성직자 임명권을 스페인 국왕에게 부여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가톨릭 사제들은 로마 교황이 아닌 스페인 국왕에 충성을 바쳐야 했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의 밀착 및 교회 권한의 비대화는 라틴아메리카의 고질적 문제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타파하기 위하여 1910년에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해방신학이 출현하였다.

이재학 문과대 교수·서어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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