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하였다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하여 지중해 무역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다.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는 동방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인도양으로 진입하는 항로를 장악해야 하지만, 동쪽으로의 항로는 이미 이슬람 세력이 선점하고 있었다. 인도양으로 가기 위한 새로운 항로를 먼저 개척한 것은 국토회복전쟁을 스페인보다 먼저 끝마친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함으로써 아프리카를 남쪽으로 돌아서 인도양으로 들어가는 신항로를 개척하였다.

따라서 콜럼버스가 인도양으로 들어가기 위한 신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항로는 얼음으로 덮여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서쪽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콜럼버스에 의한 서쪽 항로 개척 이후 영국은 북쪽으로의 항로를 개척하고자 하였으나 빙하로 인하여 실패하고 만다.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최근 북쪽항로의 개척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콜럼버스에 의한 신대륙 발견은 이처럼 인도양으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과정 중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었지만, 유럽이 동양을 추월하여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신대륙 발견의 결과
아스테카와 잉카가 정복된 이후 이들 지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8세기까지 아메리카의 금과 은이 세계 총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71%와 85%에 달하였으며, 특히 초기 100년 동안 유럽으로 유입된 양은 유사 이래 유럽에서 사용되었던 양보다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급격한 금과 은의 대량 유입은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을 일으켜 물가앙등으로 인한 지주와 임금노동자들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반면 상공업자들의 경제력 향상을 촉진하여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됨으로써 부르조아 계급이 성장할 수 있었으며, 훗날 이들이 주도하는 시민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서구민주주의가 꽃 피울 수 있었다. 또한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금과 은으로 서구사회가 자본을 축적한 결과,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중국 명나라에서는 화폐의 초과발행으로 인한 물가앙등으로 화폐사용의 중단과 더불어 은의 대량유통이 시작되었다(銀行, 銀子 등의 단어를 기억하라!). 중국에서의 은 수요 급증은 이 지역에서의 은 가치 상승을 불러왔다. 16세기 당시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유럽에서는 1:12이었던 것에 반하여 중국에서는 1:6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환차익을 노리는 대량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었으며,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등을 은으로 결재하여 구매할 경우 금으로 결재할 때보다 2배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결국 멕시코나 페루 등지에서 생산된 은의 최종 목적지는 유럽이 아닌 중국이었으며, 이는 세계경제의 글로벌 네트워크화가 이 당시에 이미 구축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스페인 제국의 몰락과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16세기에 라틴아메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유입된 금과 은의 75%는 영국, 프랑스 및 네덜란드의 은행으로 흘러들어갔다. 유대인 추방으로 금융 산업이 붕괴된 상태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은 역설적으로 스페인 제조업의 발전을 저해함과 동시에, 다른 유럽 국가들이 자본을 축적하여 제조업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스페인 국내에서 자국민들이 경영하는 무역상사는 극소수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스페인의 對아메리카 무역의 5/6가 외국인들이 제조한 상품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스페인의 재정은 파산상태에 놓이게 되며, 수차례에 걸쳐 파산선고를 반복하게 된다(1560, 1575, 1596, 1607, 1627, 1647, 1653년). 결국 스페인의 금과 은으로 자본을 축적한 네덜란드와 영국 등에 스페인은 패권을 뺏기게 되고,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몰락하게 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태어난 백인인 끄리오요(criollo)들은 스페인 본국에서 파견된 관료들과는 달리 ‘2등 시민’의 대우를 받았다. 식민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력을 독점한 이들이었지만 정치권력을 갖는 것은 철저히 견제 당하였다. 상공업이 붕괴된 식민모국과의 경제적 주종관계에서 자유로운 상태였던 라틴아메리카의 끄리오요들은 경제적 이해관계로 스페인과 갈등을 겪게 되며,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 이후 내재되어 있던 불만들이 급격히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은 결국 독립투쟁으로 이어지며 19초반에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독립을 쟁취하였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전쟁을 통하여 끄리오요들은 많은 군사력을 보유하게 됨과 동시에, 독립의 대가로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독립 이후 정치권력까지 획득하게 된 끄리오요들에 의해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질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이재학 문과대 교수·서어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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