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예술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남자 소변기를 오브제화한 작품 <샘,(1913)>으로 유명한 마르셀 뒤샹이 한 말이다. 오늘 소개할 ‘존 케이지와 플럭서스 친구들’은 이러한 마르셀 뒤샹의 정신을 계승한다. 플럭서스 운동의 예술적 이상은 ‘삶과 예술의 일치’다. 전통적인 예술은 예술작품을 물적 대상화시킴으로써 예술을 ‘박제’시켰다는 혐의를 받는다. 결국 예술가조차 자신이 만든 예술작품으로부터 ‘소외’되어버렸다. 예술은 물적 대상으로 고정되어서 감상되고, 거래되고, 소유된다. 이러한 전통적 예술개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바로 플럭서스 운동이다. 플럭서스(fluxus)는 ‘흐름’을 의미하는 라틴어다. 물론 ‘플럭서스란 무엇인가’란 질문에는 명확한 답변이 어렵다. 플럭서스 운동가로 백남준, 요제프 보이스 등을 꼽을 순 있겠지만 이들이 플럭서스 운동을 대표한다고 보긴 어렵다. 그만큼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 플럭서스 운동이다. 굳이 공통적인 양상을 서술하자면 ‘전통적 예술개념으로의 탈피’ 정도로 정리될 수 있겠다.

 플럭서스 계열 예술가로 분류되는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는 ‘비구성주의 작곡가’로 불린다. 그는 근대 유럽의 고전음악이 추구하는 음악관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서양음악사에서의 존 케이지의 업적은 간단히 말해 ‘우연성(chance)의 도입’이다. 사실 클래식 음악 외에도 대부분의 음악은 구성주의의 산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성주의란, 모종의 계획을 갖고 주어진 음악적 재료를 배열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밀한 구조를 지닌 바흐 음악 같이 배열이 촘촘한 음악이든, 즉흥연주를 본연으로 하는 재즈 같이 배열이 느슨한 음악이든 구성주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존 케이지는 이러한 구성주의에서 탈피, 우연성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4분 33초>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표현된다. <4분 33초>에서 연주자는 무대에 올라서 4분 33초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다시 무대를 내려온다. 존 케이지는 동시대 화가인 라우센버그의 작품 <흰 페인팅>에서 <4분 33초>의 모티브를 찾았다. (라우센버그의 <흰 페인팅>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는 ‘회화를 지워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4분 33초>의 작곡 의도에 대해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귀를 기울여라. 그대 주변의 모든 것이 음악이다. 귀 기울이는 자가 곧 작곡가다.” 작곡가가 조직한 음으로 구성된 작품 대신에 작곡가가 제안한 특정한 시간대에 청중들 자신의 주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소리에 대해 의식하라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청중은 자기가 듣고 있는 것에 모종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작곡가가 된다. 따라서 구성주의적 작품의 개념과 이러한 작품을 작곡하는 작곡가라는 개념은 모두 해체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른바 ‘연주’는 아무나 할 수 있다. 연주의 장소도 어디든 무방하다. <4분 33초>의 초연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일종의 해프닝과 같았던 <4분 33초> 초연은 이후 백남준, 요제프 보이스 등의 ‘플럭서스 친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유설희(문과대 철학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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