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강강독] 동아시아의 산수기행문학
[명강강독] 동아시아의 산수기행문학
  • 고대신문
  • 승인 2012.06.0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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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 교수의 여행과 동아시아 고전문학 ②
▲ 심경호 문과대 교수·한문학과
논어 ‘옹야(雍也)’편에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한 것은 산수자연과 인문적 성찰과의 관계를 명료하게 제시한 말이다. 요수(樂水)와 요산(樂山)을 구별할  수도 있지만 두 구문을 호문(互文)으로 볼 수도 있다. 곧, 지혜를 갖추고 어진 마음은 지닌 사람이라면 주체와 자연과 진정한 만남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가 있다. 

한문고전 가운데 <상서> ‘우공(禹貢)’이나 <산해경>, <장자> ‘소요유’ 등에는 벌써 자연경물에 대한 묘사가 들어 있다. 단, 문학적인 색채는 적었다. 진정한 유람기는 동한 때 출현하여 남북조 때 이르러 유행하기 시작하고 당나라 때 개화했다. 당나라 때 유종원(柳宗元)은 ‘영주팔기(永州八記)’를 지어, 아름다운 산수가 미처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재능 있고 덕 있는 사람이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비유한다고 보았다. 한유(韓愈)는 ‘남산(南山)’시에서, 종남산의 광경 전체를 조망하고 장대한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자 오언고시 102운 204구의 대작을 이루었다. 특히 50개의 혹(或)자를 사용해서 산의 형상을 묘사하면서 인간의 성품을 세밀하게 비유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인조 때 장현광(張顯光)의 ‘주왕산록(周王山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송, 명나라 때는 유람의 사실을 산문으로 적은 명작들이 많이 나왔다. 육유(陸游)는 장강을 거슬러오르는 장대한 여정을 <입촉기(入蜀記)>에 기록하였다. 명나라 서홍조(徐弘祖)의 <서하객유기(徐霞客游記)>는 일기 형식으로 각지의 경승, 민정, 풍속, 물산, 수원, 지세, 지질을 상세히 서술했다. 명나라 말 원굉도(袁宏道)는 화산(華山)을 유람하고, 시각기관이 마음의 통어를 받지 않고 각각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논했다. 그 내용은 박지원이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의 감각경험론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박지원은 청각과 시각이 서로 모순하고 기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아, 경험이 선험적인 이념과는 다른 차원의 것임을 환기시켰다. 한편 원굉도는 ‘소문산 백천에 노닌 기록(遊蘇門山百泉記)’ 을 지어, “크게 ‘탐닉[溺]’하는 사람은 반드시 크게 참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라는 탐닉의 원리를 천명했다.   

한국의 산수기행문학은 고려 중엽에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이규보(李奎報)는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 에서, 부평의 계양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다가 관찰자의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산수자연의 호불호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심(定心)의 부족을 자책했다. 고려 말 이곡(李穀)은 1349년의 8월에 내외 금강산과 해금강을 유람한 후 ‘동유기(東遊記)’ 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이 글은 금강산 및 관동 일대의 기행 산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안축(安軸)의 <관동와주(關東瓦注)>와 함께 이후 관동 지방의 승경을 탐방하는 지침서가 되었다.     

조선 산수기행문학 제1의 작가는 김시습(金時習)이다. 그는 1457년 10월에 단종(노산군)이 영월에서 죽음을 맞은 다음 해 1458년 봄에 동학사의 단종 제사에 참석한 이후, 승려의 행각으로 명산을 편력하면서 가슴속에 쌓인 불평을 발산했다. 그는 1458년 가을에 관서 유람의 시를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으로 엮고는 ‘후지(後志)’ 를 남겨, 자신의 방랑을 ‘탕유(宕遊)’라 일컫고 ‘청완(淸翫)’이라고 규정했다. 김시습 이후로 혹자는 산수의 발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 사회의 우불우(遇不遇) 사실을 가탁했다. 또 혹자는 산수의 유람을 통해 기(氣)를 확충하고자 했다. 주세붕의 청량산 유람, 이황의 단양산수 유람, 조식의 지리산 유람 등은 후자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조선후기의 지성인들은 국토의 자연미와 역사미를 탐색하고 국토 이용의 실제 문제를 자각하거나, 이와는 반대로 산수간에 천성대로 노니는 것 자체를 더욱 증시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 에도시대에는 서민들이 명소 여행과 순례 여행을 했다. 1658년에는 아사이 료이(淺井 了意)의 <도카이도메이쇼키(東海道名所記)>가 간행되어 서민들의 여행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결과 기행은 명소 여행이나 순례 여행과 결합되었다. 그렇지만 하이쿠나 한시를 지으면서 곳곳에 형성되어 있는 문단을 순회하는 작가들도 많았다. 여성 작가도 있었다. 에도의 하이쿠 가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는 무소유를 지향한 은둔과 여행에 인생을 바쳤다. 그는 와카(和歌)의 명소인 우타마쿠라(歌枕)를 하나하나 탐방하고 역사 속 패자들을 진혼하는 한편, ‘시를 통한 구도(求道)’를 실행했다. 1689년 3월 하순에는 문하생 가와이 소라(河合曾良)를 대동하여 에도를 출발해서 ‘오쿠노호소미치(おくのほそ道)’의 여행을 떠났다. 오쿠는 일본 동북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아시아의 산수기행문학을 보면, 한국, 중국, 일본의 심미적 주체들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그것을 다양한 양식으로 묘사, 서술, 의론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산수를 유람하는 주체는 구도의 경우든, 탐닉의 경우든, 탐구의 경우든, 인간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조정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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